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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지지 않은 2%를 찾아서

7154 2007. 10. 6. 09:08
 

채워지지 않은 2%를 찾아서

전대선



  

밤꽃 향에 이끌리는 유월의 끝자락, 등나무 줄기를 타고 늘어진 잎이 진초록을 더한다. 등나무 아래에는 긴 나무의자가 놓여 있다. 지친 이에게는 편안한 그늘을 아낌없이 내주는 장소요, 배려의 울타리이기도 하다. 들판을 거슬러 오는 바람은 가슴속에 담긴 한숨까지도 가볍게 들어주는 듯하여 좋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가슴으로 밤꽃 향을 닮은 바람이 파고든다.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고 등나무 아래 나무의자에 다붓이 앉았다. 25년 전 교정의 한 자락을 누비며 함께 어우러져 학창시절을 보낸 후 아무런 소식이 없던 그녀다. 소리 없는 이별 뒤 찾아오는 발걸음 또한 조용했다.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가량없는 소름이 돋아 온몸으로 피어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나는 애써 갈쌍해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깊은 산사에 운둔하다시피 머무르며 불가에 입문했던 것이다. 나의 삶과는 동떨어진 길을 걷고 있는 까닭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가 학창시절 이상세계를 꿈꾸고 있을 때, 주변에서는 빙퉁그러진 것으로 보아 문제가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학생이 갈래머리를 하는데 그녀는 커트머리를 하기도 하고, 지각과 결석 등으로 보통학생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문제아로 낙인을 찍어 규격화 되어 있는 틀 속으로 잡아채기에 바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그녀가 안주할 곳은 없었다. 평범하지 않은 생각, 또래와의 흥밋거리가 달랐다고나 할까. 감수성이 예민하고 왕성할 때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얼마나 많은 날을 고통스럽게 허우적거렸을까. 그때 좀 더 일찍 그녀의 심정을 알았더라면, 후련하게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는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했던가. 이제는 함께 했던 시간들이 희미하다. 아니 잊고 있었다고 하면 오히려 명쾌한 대답이지 싶다. 빛바랜 책속에 오래도록 묻혀 있었던 네잎 클로버를 찾은 것처럼, 잊고 있었던 그녀를 보니 아련한 아픔이 느껴진다. 나와의 인연이 닿는 한 어디에 있든 이제는 기억 속에만 묻어두지 않으리라.

  비구니가 많은 수덕사에서 그녀는 한동안 지냈다. 그곳에서 자신이 찾던 이상세계를 찾은 것처럼 진정한 편안함과 가슴으로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단다. 그런 그녀를 가족들은 내버려 두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의 자리를 밀어내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녀의 결심과 각오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가족들은 그녀를 포기했다. 없는 자식으로 여길 터이니, 창피하니까 동네근처에는 얼씬하지도 말라 일렀다. 그래도 부모는 뭉개지는 아픔을 한쪽 가슴에 담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리라. 속울음을 담아 속세의 정을 애써 떼어 내려고 동네어귀를 하염없이 서성였을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려 짠해온다.

  참선 끝에 득도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고고하고 서러우나 의연한 그녀는 승복이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챙 넓은 모자 속에 드러나는 해맑은 얼굴, 승복 속에 살포시 드러난 조금은 둔탁한 손, 하얀 면양말을 신은 발을 수줍게 감싸고 있는 검정고무신…. 섬서한 분위기도 잠시, 세상의 이치를 아우르는 대화가 어느새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 주변 환경을 한순간에 용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은 자신과의 부단한 부대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지난날 자신을 옭아맨 허울을 담담히 엮어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출가하기 전 살았던, 부모가 계신 생가에 들렀다가 산사로 돌아갔다. 그토록 출가를 반대하고 당신들의 울타리에 가두려했던 마음을 이제는 이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으로 평화를 찾았단다. 오히려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한다면서.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2%가 남은 것 같은 허전함은 왜일까. 맑은 하늘같은 눈망울과 단아한 얼굴, 삭발한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다. 가슴에 파편을 맞아 멍이 든 것처럼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단지 겉으로 보이는 한 모습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드러난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편견을 아직도 갖고 있나보다. 그간의 고단했던 시간을 말하기에는 짧고도 부족하였다. 그리고 아려오는 마음이 야속하리만큼 아쉽다. 그녀의 모습에서 내게도 조금은 책임이 있는 것처럼, 가슴에 눌려 있는 오래된 체증처럼 불편하게 하고 있으니까.

  화인처럼 남아 있는 그녀의 모습. 가끔은 나를 생각하며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고 작으나마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 날 훌쩍 산사에 들러 마음 나눌 수 있는, 자연을 벗 삼아 감사할 줄 아는 도량을 갖춘다면 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각박하다는 세상인심에 잠시나마 등을 돌려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에 평화로운 마음을 구하고 싶다.

   그녀와 앉았던 등나무 그늘이 만들어준 의자에 앉는다. 이제는 그녀가 남기고 간 채워지지 않은 2%를 찾아야겠다. 그녀가 말하려 했던 ‘있어야 할 자리는 지금의 자리’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해야겠다. 마음으로 소원하고, 부단히 노력하면 이룬다 했던가. 그녀의 쉼 없는 정진이 그러하듯 나의 자리에서 삶의 방식대로 천천히 나를 찾아간다면….

  이상이 다름으로 오는 편견을 버리고, 함께 갈 수 있는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야겠다. 희미한 기억을 그리워하기 보다는 네잎 클로버의 행운을 생각하듯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기억해야 하리라. 다음에 오게 될 그녀와의 만남에는 소름 돋는 반가움 보다는,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오랫동안 바래왔던 정제된 아름다움이길 기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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