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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빙원(氷原)

7154 2007. 10. 12. 14:06

 

내 안의 빙원(氷原)

          김명숙


내 오른 쪽 종아리에는 약 5센티 정도의 흉터가 있다.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 네 살 차이 여동생과의 다툼 끝에 얻은 영광의 상처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와 언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자꾸만 까불고 덤벼드는 동생에게 묵묵히 주먹을 날려 한방 먹였는데 이에 화가 난 동생이 화로에 꽂혀있던 부젓가락을 꺼내 순식간에 내 종아리를 난타했던 것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 상흔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눈에 뜨일 때마다 언짢은 기분을 간혹 심중에 품게 한다. 그러나 한동안 욱신거리며 고통을 수반했던 상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아물고 그로 인한 화증도 점차 사라져 이내는 예전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가해자를 대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모든 상처가 그렇게 말끔히 아물고 그 상흔마저도 유행가 가사처럼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가슴에 간직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고 수시로 날카로운 통증을 유발하는 상처도 있기 마련이어서 문득 문득 가슴을 베이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일까. 타자에 있어서는 아무렇지도 않을 사연들이 당사자에 있어서는 천추에 씻지 못할 한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 맺힌 한은 복중 염천의 한낮 땡볕에 나가 앉아 있어도 결코 녹지 않는 얼음 덩어리 하나를 가슴 깊이 간직하게 하기도 한다.

  내게도 그렇게 ‘결코 녹지 않는 얼음 덩어리’ 같은 상처 몇 개 심중에 남아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추레한 몰골로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그 시절의 극간이다.

가난을 무슨 훈장처럼 달고 살았던 어린 시절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코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다. 산밑에 달랑 한 채 지어져 있던 나의 집은 말 그대로 다 스러져 가는 초가집이어서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온 집안이 삐걱거릴 정도였다. 한 겨울 눈이 하얗게 쌓여 인적은 더욱 드물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그 숫눈길엔 산 짐승의 발자국 몇 개만 인사처럼 찍혀있을 뿐이었다. 탈피하는 번데기처럼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부엌으로 난 쪽문을 빠끔히 열면 어머니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본체에 이어 덧댄 부엌은 오랜 풍설에 삭아 군데군데 찢겨져 나간 함석지붕 사이로 언 듯 보이는 하늘이 물감을 칠한 듯 파랗기만 했다. 녹이 슬고 뜯겨져 덜컹거리는 함석 쪼가리와 대비되는 그 하늘빛을 보면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우리들을 지키고 선 어머니가 생각나서 울컥 눈물이 솟곤 했다. 남의 집일을 봐주고 있던 어머니는 식전에 집을 나서야했다. 연탄아궁이 옆에 올려놓은 노란 양은 냄비가 어머니 대신 언제나 부엌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안에는 몽실몽실 김이 오르는 하얀 쌀밥 대신 누런 시래기죽이 입맛을 다실만큼만 담겨져 있다는 것을 나는 뚜껑을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땔감이 떨어져 온기를 잃은 지 오래 된 부뚜막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몇 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는 이방인이었다. 어쩌다 마음이 내켜 뒷산에 올라가 나무 몇 짐 해다 놓으면 그것만으로도 가장 노릇은 다 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엘 가는지 식구들이 무엇으로 끼니는 연명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다. 그런 것은 아버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의 집일이었다. 술주정이나 않으면 그것으로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며칠 일한 삯으로 양식을 마련해 오면 어디서 엄한 짓 하다 들어왔다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아버지가 집어던져 마당 가득 쏟아져버린 쌀을 주워 담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도 내 가슴 한 귀퉁이에 화인처럼 남아 시시때때로 울컥거리는 비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술김에 행패를 부리다 깨어나면 미안해진 아버지는 또 소리도 없이 집을 나갔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아버지는 때로 한 계절이 다 지나고 나서야 어스름한 달빛을 쌀자루 마냥 등에 지고 마당에 들어서는 것이다. 아버지는, 잊힐 만하면 찾아 와 행패를 부리고 가는 빚쟁이처럼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일 뿐이었다.

아침에 일을 나간 어머니는 해거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의 집들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슬픔이 치밀어 올라서 나는 굴뚝 옆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곤 했다. 산마루를 붉게 물들이던 잔양마저 스러지고 난 산 밑 집은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들창을 두드렸다. 바람에 굴러온 오동나무 이파리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창호지 문 밖을 지나갈 때면 그 집 초가지붕 아래엔 머루 같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 몇 만 어둠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잿더미 속에 던져진 고구마처럼 해진 이불 속에 다리를 묻고.

그 어린 날의 기억은 내 안에 완쾌되지 않는 우울증을 병으로 남겨 놓았다. 그리하여 어스름 저녁 무렵이 되면 까닭 없이 침울해 지는 마음자락으로 칼날 같은 슬픔 하나 유성처럼 휙휙 지나가곤 한다.

추억은 추억일 뿐 그것이 현재에 있는 나에게 더 이상 어떠한 상해도 입히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간혹 과거 속에 묻힌 그 기억들 때문에 내 안의 상처에선 피가 흐른다. 어쩌면 살아가는 날들이 그 덧난 상처를 치유하고 그 상흔을 덮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간혹 평화의 날들이 지속되기도 하고 불안의 시간들이 도둑처럼 마음 바닥에 스며들면서 자위와 자학의 이중적인 잣대로 나 자신을 재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한 자생하는 의지도 있기 마련이어서 그것을 지지대로 지금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극한의 환경 속에서 자란 나무가 더 튼튼한 뿌리를 내리듯이, 그 극간의 시절은 나로 하여금 어떤 어려움과도 맞설 수 있는 오기와 자존을 등뼈처럼 꼿꼿이 간직하며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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