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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그림자

7154 2007. 10. 19. 05:02

검은 그림자

   임영숙



 잠금장치가 창문마다 고장이 나 긴 막대를 가로지르고 밤을 보내야 하는 오래된 집이었다. 주인집 통로인 계단에서 방범창도 없는 욕실이 들여다보이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두 딸과 서로 훈김을 쐬며 잠 들 수 있는 공간이 생겨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현관이나 창문이 좀 엉성하고 비좁긴 해도 지하가 아닌 1층이었으며 큰딸의 피아노를 거뜬히 들여놓았고 얼마간의 세간붙이도 어렵지 않게 간동할 수 있었다.

 세상사는 일이 재미없다며 남편이 말 한마디 없이 하늘로 떠난 후,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알천들을 내어주고 딸아이들과 간신히 두 번째 이사를 한 곳이었다. 관악산 줄기 밑, 산공기 서늘하고 석양이 아름다운 동네에서 태어나 중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살아온 집을 떠나야 했던 두 딸은 급작스런 환경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이사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작은딸 워크맨이 없어졌다.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맡기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는데 보이지 않는다며 도둑이 든 것 같다는 딸에게, 다른 물건은 그대로 인데 워크맨만 없어 졌다면 도둑이 든 게 아니라 챙겨 둔 곳을 찾지 못하는 거 아니냐며 야단을 쳤다. 다음 날 늦은 퇴근을 해 집에 돌아와 보니, 그동안 용돈을 아껴 한 푼 두 푼 모아둔 저금통도 없어졌다며 딸아이들이 울상이 되어 있었다. 워크맨이나 저금통이 없어진 일은 그렇다 치고 안방이며 주방에 발자국이 남아 있는가 하면 욕실 창문으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자정이 다되어야 보습학원 일이 끝나던 나는, 이후로 딸아이들만 늦은 밤까지 둘 수 없어 학원에 데리고 있다 함께 귀가를 하였는데 혹여 아이들에게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어 날마다 생선가시를 목으로 넘기는 것 같았다.

하루는,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출근준비를 하다가 베란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나이가 어려 뵈는 사내 녀석이 방충망을 떼어내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빗자루를 들어 머리를 세게 밀어내자 놀란 기색도 없이 침을 뱉으며 유유히 걸어가는 게 아닌가. 그 뿐이 아니었다. 해거름 혼자 있던 작은딸도 똑 같은 일을 겪게 되었고 더 오싹 한 것은 특히 욕실 창문에서 검은 그림자가 더 자주 보였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전후 사정을 주인아저씨에게 이야기를 하고 창문 잠금장치를 고쳐 달라 했지만, 오래 된 창문이라 장식을 구할 수 없다며 불편하더라도 그냥 살라는 매정한 말뿐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에서 속옷이 없어지거나 아이들 브래지어가 도막나 있기도 하고 팬츠가 바닥에 떨어져 있어 불안은 더해 갔다. 그래서 유일하게 잠금 장치가 있는 안방으로 건조대를 들여 빨래를 널고 창문이며 방문을 단단히 잠그고 출근길을 나섰다.

 심신이 고단할수록 당시 악몽을 자주 꾸었다. 얼굴이 흉측하게 생긴 아기가 발가벗은 채 거실 베란다 보호대에 붙어 안으로 들어오려고 손을 뻗어서는 급기야 내 몸에 매달려 끈적거리던 꿈…. 그 꿈처럼 변태의 훔쳐보는 눈길이 연일 느껴지고 있었다. 벗어나고 싶었으나 현실은 내게 사막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바람이 불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날들을 보냈다. 샤워를 하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오기를 수십 번, 그대로 있을 수 없어 경찰 지구대를 찾아가 보았으나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요, 별다른 대책이 없다며 그저 조심하라는 말뿐이었다. 피가 마르도록 훔쳐보는 그림자 찾기를 하는 동안 주인집 아들일 것이란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으니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수업이 일찍 끝나 돌아오던 날, 욕실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소리를 지르며 쫓아 올라가자,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계단을 뛰어 주인집으로 도망을 쳤다. 곧장 뒤따라가 그동안 모골 송연했던 정황을 이야기 하자, 주인아저씨는 자기 아들이 절대 그럴 리 없으니 생청 부리지 말고 당장 집을 비워달라며 외려 토색질을 하는 것이었다.

 콩도 들어 있지 않은 백설기를 한 주먹 떼어먹을 때나 삶은 달걀의 노른자 수십 개를 씹어 삼킬 때처럼, 그저 퍽퍽하여 목이 메어도 물 한 잔 가져다 줄 사람조차 없어 막막하고 울연하던 그 날은 설움, 설움 해도 집 없는 설움이 가장 크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던 날이었다. 하는 수 없이 큰딸이 분신처럼 아끼던 피아노를 처분해 보증금을 만들고 작은 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여자 셋이 누우면 가득 차는 방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염아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 이후도 우리 세 모녀는 여러 번이나 이사를 했다. 우리 문패가 걸린 첫 집을 눈물로 비워줄 때 오빠 댁에 맡겨 두었던 가구들을 다시 챙겨 앉혀 놓을 수 있을 만큼의 집까지 이사를 했어도, 억울하게 집을 비워주며 처분한 큰딸의 피아노는 7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 찾아주지 못하고 있다. 사는 동안 몇 번이나 이사를 더 하게 될지, 내 이름 석자 새겨진 집을 또 가질 수 있을지 알 순 없다. 그러나 매 순간 고빗사위를 함께 넘기며 곁에 있어준 딸들로 삶의 어룽진 자국들은 쉽게 지워진다. 올해 대학 졸업반이 된 작은 딸은 종종 그 집을 떠올리며, “엄마, 엄마 그 때 그 변태. 우웩” 하면서 너스레를 떤다. 사춘기를 애옥살이 이사와 보내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늘 당당하고 이삿짐을 제 어미보다 잘 꾸려내던 아이들, 아마 나는 우리 아이들이 저희 가슴속에 지어준 큼직한 집에서 여태껏 살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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