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전국 3대 조직 중 하나인 양은이파의 두목으로 악명을 알린 조양은이 한 중견 트로트 가수를 협박한 혐의로 또 다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다. 대중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범죄와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조씨를 두고 ‘천성은 어쩔 수 없다’ 든지 ‘걸레는 빨라도 걸레’라며 비난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그의 라이벌로 널리 알려진 서방파 전 두목 김태촌 역시 여전히 범죄단체 조성 가능성 등의 이유로 경찰의 주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세간을 눈살을 찌부러트리고 있다.
검찰과 경찰의 조직폭력배(조폭) 단속이 강화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눈길을 끌만한 조폭 소식이 최근 들어 자주 들려오고 있다. 한 때 전국 최대 조직을 이끌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해온 양은이파의 조양은과 서방파의 김태촌이 각각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것. 조양은과 김태촌 모두 자신 인생의 절반가량을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들로 국내에서 조폭을 거론할 때면 빼 놓을 수 없는 거물들이다.
경찰은 조양은이 모 유명 중견 트로트가수를 협박해 수십억원을 갈취했던 것으로 파악 중이며, 김태촌에 대해서는 강원도 일대 대형병원 갈취 등 범서방파가 저지른 몇몇 범죄에 관여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지난 1995년과 2000년 초 교도소 출소 직후 나란히 ‘이제는 범죄에서 손을 때 새 삶을 살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어,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 못한 이들의 행적에 대해 비난 여론이 쏟아내고 있다.
조폭의 변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조폭이 등장한 시점은 일제 강점기로, 1920~30년대 지방청년들은 일제 수탈이 심해져 먹고 살기 어렵게 되자 대도시로 올라와 유흥가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조폭을 결성했다. 그 당시 조폭들은 자신들을 건달이라 불렀는데, 종로에 자리 잡은 구마적(고희경)과 신마적(엄동욱) 그리고 쌍칼(김기환)을 비롯해 함경도 출신인 시라소니 등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대표적 건달이었다.
이들을 이어 종로의 새로운 오야붕(두목)에 오른 김두한의 경우, 태생에 대한 소문과 시대적 상황 탓에 애국지사로 비춰지기도 했다. 특히 김두한은 명동에 자리 잡은 하야시(한국명·선우영빈)와 벌린 혈투가 대중들에게 미화돼, 이후 수차례 영화 소재로 사용된 바 있다.
해방이후 조폭들의 모습에 변화가 찾아왔다. 혼란한 나라 상황 탓에 조폭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된 것. 흔히 정치깡패라 불리는 이들은 성향과 이권에 따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대표적인 정치깡패로는 자유당을 따르던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과, 친민주당계로 알려진 이화룡의 명동파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깡패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단숨에 자취를 감췄다. 군부 정권의 강압통치가 시작되며 예전처럼 조폭들이 정치판에서 드러내 놓고 활개 칠 일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명동파의 행동 대장이던 신상현은 정치권의 손길이 닿지 않던 암흑세계에서 힘을 키워 자신의 조직을 전국 최대 규모로 성장시켰는데, 이 조직은 신상현이 특무상사 출신이라 ‘신상사파’라 불렸다.
이때쯤 호남에서는 젊은 조폭들이 대거 서울로 상경하기 시작했다. 범호남파는 무교동 일대 자리 잡은 오종철과 박종석 밑으로 주로 몰려들었는데, 세력이 커진 범호남파와 신상사파 간에 분쟁이 발생하며 조폭 세계에 또 다시 변화가 찾아왔다. 특히 오종철파의 행동 대장이던 조양은이 신상사파의 거점인 사보이호텔을 기습한 ‘사보이사건’은 조폭 세계의 주도권이 신상사파에서 범호남파로 넘어오게 만든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이후 조폭세계는 호남출신들로 이뤄진 양은이파·서방파·OB파 이들 3대 조직간의 악명 높은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울러 당시 지방에서도 전국구로 알려진 부산 칠성파를 비롯해, 대구 동성로파, 대전 옥태파 등 각기 세력을 가진 조폭들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형 유흥업소의 운영권을 차지했고 주류 도매, 건축자재 공급 등으로 부를 축적했고, 채권·채무관계에 개입해 해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또한 신군부가 집권한 1980년대엔 사회·친목단체를 가장해 본색을 숨기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조폭세계는 크게 위축됐다. 호남 3대조직의 경우 두목이 상대파의 보복으로 조직 세계를 은퇴하거나, 수감에 의한 장기간 공백으로 조직 자체가 와해되는 상황에 내몰린 것. 다른 조직들 역시 두목이 줄줄이 붙잡혀 갔다.
이에 현재 조폭세계에서는 예전 같이 대규모 조직원을 갖춘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이들은 자신들의 불법을 합법적인 사업으로 위장한 뒤 조직을 육성하고 있으며, 지난 2001년 이용호 게이트와 같은 권력형 비리에도 관여하고 있다.
조양은과 김태촌의 등장
신상사파가 주도하던 조폭세계에서 범호남파 시대를 이끌어 낸 조양은과 김태촌은 지난 30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굵직한 조폭사건에 빼놓지 않고 거론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OB파의 이동재와 함께 전국구 조직인 양은이파와 서방파를 각각 이끌며 각종 폭력사건들을 저질러 왔다.
우선 양은이파의 두목인 조양은의 경우 1950년 광주 태생으로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그가 전남 순천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가 10대 나이에 광주에서 조폭세계에 들어섰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드려지고 있다. 이후 조양은은 이른 나이에 자신을 따르던 호남 출신 동생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는데,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앞서 밝혔듯 1975년 사보이사건 때문이었다. 사보이사건 이후 조양은은 경찰의 추격을 받는 신세가 됐지만, 그의 이름을 딴 ‘양은이파’는 서울 밤거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며 전국 최대 조직으로 성장하게 됐다.
조양은 보다 한 살 많은 김태촌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광주 서방면에서 지냈고, 서방파란 자신의 조직 이름도 이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그는 조양은과 달리 서울로 행동무대를 옮기기 전 이미 광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상경 이후 김태촌은 오정철과 함께 범호남파의 중심축을 이루던 박종석 밑으로 들어가 행동대장으로 활약했는데, 조양은에 의해 박종석이 린치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양은과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됐다.
조양은과 김태촌은 서로가 서로를 오랜 기간 라이벌로 여겨온 사이로 예전에는 서방파와 양은이파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패싸움이 벌이지기도 했다. 둘 중 누구 더 대단한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당시 세력은 양은이파가 더 컸지만 범호남파란 정통성은 서방파가 가지고 있었다는 의견이 대체적이다.
동반 몰락
조양은과 김태촌은 서로가 서로에게 오랜 기간 강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며 수차례 충돌했지만, 도를 넘어서는 범죄 행각으로 인해 모두 공멸하고 말았다. 더욱이 이들은 스스로 대중에게 한 교화의 약속을 번번이 깨트리고 범죄를 저질러 사회적 눈총을 받기도 했다.
우선 조양은은 지난 1980년에 폭력조직 결성 혐의로 구속된 후 15년 형을 받아 지난 1995년 출소했다. 당시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를 만나 종교에 눈을 떴다며, 앞으로는 조직폭력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종교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화제가 된 바 있다. 실제 그는 그 이후 각종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고 부흥회 등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옥중 약혼한 여인과 결혼식을 올려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보스’를 직접 제작하고 주연까지 맡아 출연하며 새로운 삶의 시작을 대중들에게 성대히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범죄와 손 씻겠다는 그의 다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임이 밝혀졌다. 지난 1996년 마약 밀반입 시도 및 살인 미수는 물론 고액의 스키장 이용권 갈취 등 10여건의 혐의로 기소된 뒤 2년 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또한 그는 재출소 후인 지난 2001년에도 영화 ‘보스’의 감독과 스태프들을 폭행하고 판권을 갈취한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 받기도 했다.
아울러 조양은은 지난 2008년에도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술집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 황모씨가 말대꾸를 한다는 이유로 폭행한 것은 물론, 해외 원정도박으로 경찰에 기소된 바 있다. 이에 조양은이 현재까지 폭력사건에 연루돼 받은 검찰 기소만 7차례나 되며, 19년 4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수감생활을 해와야만 했다.
김태촌 역시 총 10번의 교도소 생활을 했는데 소년원까지 포함하면 13번이나 감옥을 갔다 왔다. 이는 그가 인생의 절반이 넘는 33년이란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만 했다.
김태촌이 처음 수감한 것은 지난 1986년 뉴송도 호텔나이트클럽 사장인 황모씨 폭행사건 때문으로 그는 당신 징역 5년에 보호감호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1990년 출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폭력조직 신우회를 구성한 혐의로 재구속돼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지난 2005년 경기 안양교도소에서 석방됐다. 그리고 이 기간 중 서방파는 조직관리가 되지 않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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