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이승훈
사랑하는 이든 자신이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죽음이다. 대부분 사람이 정초의 소망을 물으면 건강이라 답하면서도, 살아가면서 흔하게 경험할 일도 아니고 죽음 자체가 주는 싸늘한 느낌 때문에 죽음은 평소 남의 일로 여겨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행여 주위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해 언급할라치면 재수 없는 소리 말라는 책망부터 듣게 된다. 하지만 언제 어느 때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고 필연적 이별을 가져온다는 점을 학교든 가정에서든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왔다면,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오는 깊고 오랜 고통이나 심한 좌절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에 보다 충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는 두려움도 조금은 희석되리라 본다.
자주 안부를 물어오던 J가 한동안 기척이 없어 궁금하던 차에 그 동안 몸이 아팠다며 보내온 편지 내용은 대충 이랬다.
배와 허리의 심한 통증으로 초음파 검사를 했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여 일단 안심했지만 통증이 여전해 휴가를 내고 대장 쪽의 정밀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몸이 아픈 내내 만사가 싫어지고 갑자기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초조하고 두려웠다. 또한 내가 없는 사이 누군가 자신의 살림을 들여다보게 되면 얼마나 욕심 많은 사람으로 비추어질까 싶은 생각도 들어 며칠간 당장 불필요한 물건 등 살림의 절반을 정리하고 나자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을 테고 또 그러길 바라지만 아마 J는 통증이 올 때마다 불길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평소 건강하다 갑자기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때 사람은 불안해지기 마련이어서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안쓰러웠다. 아무래도 불혹 가까운 삶이라면 주위에서 죽음을 종종 접하게 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본 경험이 있음직하다.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하는 일처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은 없을 테지만 어딘가 아프면 나는 너무 쉽게 죽음을 생각하고 우울해진다. 죽음에 대한 남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내 생에는 네 명의 가족과 두 명의 절친한 친구의 죽음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네 살 난 여동생의 죽음이었다. 눈이 어찌나 동그랗고 큰지 "눈보"라 불렀던 성희는 딸을 귀엽게 여기지 않던 당시의 세태와는 달리 아버지의 자전거와 무릎을 떠날 줄 몰랐다. 그런 아이가, 아버지는 다른 지방으로의 출장을, 어머니는 이웃마을 친구 분 댁의 모내기를 도우러 가시고 나와 동생들만 있던 어느 날 갑작스런 경기(驚起)를 했다. 더럭 겁이 난 나는 신열을 내며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를 들쳐 고 어머니가 계신 이웃마을로 향했다. 우리 을과 경계인 등마루를 넘어가자 성희는 자꾸만 늘어져가고 점점 무거움이 더해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사색이 되어 찾아온 나를 보고 너무 놀라하시던 어머니는 신발도 벗은 채 성희를 안고 가까운 한의원으로 뛰어가셨지만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모내기가 한창이던 때, 내 등에 업혀 참으로 허망하게 죽어간 성희는 뒷산 기슭 잔솔가지 아래 봉분 없는 옹관묘를 써서 묻었다.
지독한 추위가 몰아치던 겨울, 아버지는 설을 사흘 앞두고 돌아가셨다. 내가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의 일이다. 상당 기간 병환 중이던 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계셨지만 어쩐 일인지 우린 물론이고 어머니에게조차 병명을 알리지 않으셨다. 광주에 있는 대학병원을 다니면서도 함께 가겠다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언제나 혼자 다녀오시곤 했다.
몸이 부어오기 시작하던 그 해 겨울, 호박에 미꾸라지를 넣은 중탕을 해먹으면 호전된다는 이웃 어른의 말씀을 듣고 얼음 성성한 논바닥을 맨발로 뒤져 미꾸라지를 잡아 날랐지만 아버지의 부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겨울바람마저 소름끼치도록 불어대던 그날 밤, 간헐적으로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하시는 아버지의 신음과 어머니의 안타깝게 울부짖는 리가 밤새 안방에서 들려와 온통 두려움뿐이었다. 당신 나이 갓 50을 넘긴 해였고 병명은 간경화……. 이후 한 동안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면 나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려 집에 붙어있을 수 없었다. 어른들은 날 너무 사랑한 당신께서 일부러 정을 떼고 떠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 번째는 군 입대하기 전 해의 전기 감전 고를 당한, 내 신체의 일부 같던 친구였고 네 번째는 내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또 다른 친구의 죽음이다. 입영을 불과 보름 남짓 남겨두고 있던 날, 나이는 같으나 한 해 먼저 입대를 한 친구가 첫 휴가를 나와 찾아왔다. 이미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취기가 있던 그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늦은 밤 시내 가는 길을 따라나섰다가 소주를 나누어 마시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본시 산간오지에서 군 생활을 하다 첫 휴가를 나오면 객기를 부리기도 하던 때라 친구 역시 다분한 기질을 보이는 중이었다. 달려오는 차를 잡는다며 몇 번이나 도로 중앙까지 나서던 것을 간신히 붙들고 오다 갑작스레 내 손을 뿌리치는 바람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 순간 친구는 빗길을 질주해오는 트럭에 받혀 가드레일 너머로 튕겨 나갔다. 당황해하는 운전자를 추슬러 차를 시내로 돌리게 해 병원으로 가던 길, 깨어진 앞 유리창을 통해 빗물이 거침없이 파고들어 우린 두려움과 추위로 부들부들 떨었고 친구의 고개를 떠받친 팔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피가 절대 꿈이 아님을 알게 했다.
이후 친구는 다행히 완치되어 나머지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했으나 일 년쯤 직장생활을 하다 과음과 후유증이 겹쳤던지 다른 사람과의 사소한 시비 끝에 세상을 떠났고 그 때 제대로 붙잡아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은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몸서리치게 한다.
불과 몇 해 전 교통사고를 당한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의 죽음과 뇌종양을 앓다 돌아가신 형의 죽음은 아직 언급하기조차도 싫다.
내 영혼에 너무 선명하게 각인 되어버린 이런 죽음 때문인지 악몽을 꾸곤 한다. 주위의 누가 죽었다며 슬피 통곡하다 그 울음소리에 스스로 놀라
꿈을 깨기도 하는……. 이렇듯 가까운 이들의 비정상적 죽음을 통해 받은 상처는 내 삶의 색조를 염세적으로 변하게도 했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작 담담한 편이다. 몸이 아파 요절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떠올릴 때면 두 가지 바람을 하곤 한다. 그 하나는 살아남은 자의 상처가 되지 않도록 쉽게 잊히는 죽음이길 바라고 다른 하나는 쓸 만한 장기 하나쯤은 남아서 필요한 누군가에게 이식해주고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삶일지라도 내 죽음을 슬퍼하고 아파할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플 때의 나를 더 두렵게 한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해온 탓이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차가운 바람과 빙판길이 혹독한 겨울을 예고하는 것 같아 임오년의 첫 산책길을 쓸쓸하게 했지만, 오전이 되자 창을 통해 들어오는 고운 햇살과 까치의 경쾌한 지저귐이 새삼스레 기분을 환하게 한다. 이처럼 새해는 한 줌의 햇살과 가벼운 새소리도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와 몇 해 동안 더 짙어진 나의 염세적 색조가 퇴색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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