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기사스크랩

상처

7154 2007. 10. 16. 18:52
 

상처 

   박래여




티 없이 맑은 표정이다. 노랑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날개 짓 한다. 예닐곱 살 될까 말까 한 단발머리에 민소매 노랑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영락없이 노랑나비다. 아이는 계산대 앞의 여자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도 무심하다. 베로 만든 분홍 쌈지의 주둥이를 벌리고 조그마한 둥근 채반에 담긴 껌을 꺼내 담는다. 채반에 담겼던 껌이 하나도 남김없이 쌈지 속으로 들어간 후에 아이는 나비 날개 같은 두 끈을 잡아 쭉 편다. 주둥이가 꽃잎처럼 오므라진 쌈지를 뱅글뱅글 돌리며 여자를 보고 방긋 웃더니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한 후 현관문 밖으로 팔랑거리며 뛰어간다.

길가의 가로수 아래 상아빛 양산을 쓴 삼십대 정도의 아낙이 무심한 표정으로 거리를 보고 있다. 아이는 그 여자 옆으로 뛰어가더니 여자의 손을 잡는다. 아이와 여자는 마주보며 환하게 웃는다. 아이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쌈지를 들어 여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흔든다. 금세 여자와 아이는 양산에 가려져 모롱이를 돌아 사라진다.

그런 아이가 있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아이, 늘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던 아이, 언니 오빠들에게 풀빵이나 과자를 잘 사주던 아이, 자기 집이 부자라고 자랑하던 아이, 아버지와 오빠들이 자기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던 아이, 말주변이 좋고, 붙임성이 좋았던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거짓말을 밥먹듯이 했다. 한 마을에 살던 나는 그 아이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날은 심부름 값으로 아버지께 받은 거금 500원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공교롭게도 그 아이와 같이 걷게 되었다. 학교와 집 사이에 시장이 있었고, 시장과 학교 사이에는 긴 다리가 있었다. 우리들의 놀이는 그 다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책 보따리 던져 놓고 뼘 따먹기, 사방치기, 가위바위 보로 걸음 떼어놓기. 봉사 잡기 놀이, 다리 난간 걷기 등,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런 놀이도 신나게 했다. 시장 통에 있는 아이 서너 명과 우리 마을 대 여섯 명 쯤 되는 아이들이 내기 시합을 하며 노는데. 나는 봉사 잡기 놀이만 잠깐 하고 만화책 본다고 중간에서 빠졌다. 시장 통 만화 가게에서 만화 삼매경에 빠졌다가 해가 설핏 기운 후에 만화책 한 보따리를 빌려 품에 안고 득달같이 집으로 달음박질 쳤다.

하필이면 그 날이 할아버지 제사였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삽짝에서부터 큰 소리로 고함을 쳤는데. 마당가에서 전을 부치던 숙모님도, 사랑채 무쇠 솥에 떡시루를 얹어 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어머니도 󰡐�아이쿠, 내 새깽이 인자 오나 배 고푸제? 퍼떡 주전부리 좀 해라.󰡑� 며 반겨 맞아 주시던 할머님도 나를 반기는 기색보다 큰일 저질렀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봤다. 집에 늦게 온 것이 죄가 된 나는 무춤하게 서 있는데.

󰡒�니 돈 오데서 나서 만화 보로 갔노?󰡓�

할머니의 추궁이 시작되었다. 내가 만화책 본다고 시장 안에 들어간 것도, 학교 파한 시간도 환하게 알고 있었다. 돈의 출처며, 돈을 쓴 내력이며, 만화책 보러 간 시간까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풀어내야 했다. 출타한 아버지 오시면 물어보면 안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쉽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셨다. 도대체 왜 그러냐니까. 아랫집 그 아이네 집에서 돈 3천원을 잃어버렸는데. (사십여 년 전 돈 3천원이면 아주 컸다.) 그 돈을 훔친 아이가 바로 그 집 고명딸이고, 그 딸이 돈을 잃어버렸는데. 하필이면 그 때 내가 중간에서 만화 본다고 빠졌다는 것이다. 봉사 놀이 하자고 제안했던 내가 돈을 훔친 것 아니냐며 그 집에서 찾아와 난리가 났었다는 것이다.

나는 울면서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항변했고, 할머니 손에 끌려 그 집에 가게 되었다.

그 집 대문을 들어서서 할머니께서 그 아이의 어머니 택호를 부르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먼저 나왔다. 마루 끝에 선 남자는 뒷짐을 지고 마당에 서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대뜸 이렇게 소리쳤다.

󰡒�저 도독 년 보래이.󰡓�

그 한 마디에 이성을 잃은 건 할머니가 아니라 어린 나였다. 내 호주머니에 남은 잔돈을 댓돌에 패대기치면서 당신 딸이 도독 년이지 왜 내가 도독 년이냐고 발악을 쳤다. 그 남자는 어른에게 눈 똑 바로 뜨고 패악 친다고 저 년 때려죽인다고 설치자 할머니는 남의 귀한 손녀를 도둑으로 몬 것도 괘씸한데 이 년 저 년 한다고 대판으로 쌈이 붙었다.

어린 마음에 어찌나 큰 상처였는지 아이들 키울 때 딱 두 가지만은 용서가 안 된다고 가르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거짓말과 도둑질이다. 아무리 사소한 거짓말도 안 된다고 가르치고, 남에게 의심받을 짓은 아예 할 생각을 말라고 주지시켰다. 만에 하나 내가 받았던 그런 상처를 아이들이 받을까 봐 두려웠는지 모른다.

물론 그 아이의 자백으로 모든 오해가 풀렸고, 그 집 식구들이 사과를 했지만 내가 받은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았다. 지금은 아픔 없이 추억할 수 있지만 그 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오랫동안 그 집 앞을 지나다니지 않았고, 그 아이와 친구의 인연을 끊었었다. 그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그 아이가 혼자 살다가 서른 겨우 넘기고 암으로 이승 떠났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을 때 󰡐�그렇게 남에게 몹쓸 짓을 했으니 잘 될 리 없지.󰡑�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기가 막혀서.󰡓�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선웃음을 지으며 나를 본다. 계산대 아래서 큰 봉지를 꺼내더니 새 껌 통을 뜯어 네 개를 내게 내민 후 낱개를 빈 채반에 담으며 나 들으란 듯이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저 아이 상습범 이예요.󰡓�

󰡒�아는 아인가요?󰡓�

󰡒�가끔 저렇게 아이 엄마랑 와서 비빔밥 한 그릇을 시켜 나누어 먹고 가요. 갈 때마다 껌을 싹쓸이 해 가요. 꼭 작은 통이나 쌈지를 들고 오는데. 하도 천진난만해서 하는 짓을 막지도 못해요. 도대체 저 많은 껌을 가지고 가서 뭘 하는지. 요즘 아이들 참 영악해요.󰡓�




블로거와 함께하는 테마수필가기 http://www.sd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