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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4 2008. 6. 11. 12:27
 


권중휘


 


개가 충성되다, 비굴하다, 고양이와 못 사귄다 따위 말들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글로도 읽고 하면 의당 그러리라는 생각이 고정해 버리는 수가 많다. 어떤 개든지 언제라도 충성되고 비굴하고 고양이와 사이가 좋지 않은지 의심해 보는 일은 별로 없다.

고양이와 개가 서로 으르렁거린다는 말을 듣고 한 집안에 이 두 동물을 두기를 꺼려한 일도 있었으나, 도적과 쥐소동에 부득이 길러보게 되었더니 새끼 때부터 같이 있어 그런지 성가시지 않고 큰다. 고양이가 좀 기분 나빠하는 눈치가 가끔 있으나 개가 점잔을 빼고 본체만체해 버리곤 한다. 다만 고양이가 제 밥그릇 가까이 갈 때면은 개가 못마땅해 하는 듯하다. 개와 고양이는 성질이 몹시 달라서 개는 남의 간섭이 많고 야단스럽고 참을성이 적고 추잡하고, 고양이는 저만 알고 게으르고 깨끗하다. 그래서 그렇지 두 종류를 다 같이 좋아하는 일은 드물고 우리나라에서는 대게 개 편을 드는 분이 많은 듯하다.


서양에서도 개가 비굴하다고 멸시를 받던 때가 있었다 한다. 주인의 발꿈치를 치근치근 따르고 음식물에 염치없는 꼴을 흔히 볼 수 있다. 개가 소득이 있을 법하면 꼬리를 치고 설레는 양이 아유하는 것처럼 해석도 된다. 도대체 개가 처음부터 그런 성질의 있기 때문에 사람과 친하게 된 것인지, 사람이 오랜 세월을 두고 이런 습성을 길러준 것인지 모르겠다. 개가 이처럼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주지 않았던들 사람은 그를 귀애하고 양육하고 번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개가 비굴한 게 험이라면 사람도 일만의 책임이 없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의 비굴성이 개에게서 전염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래 같이 크고 놀고 벗하는 동안에 상대편의 심리상 영향을 받는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개의 악덕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사람에게 애당초 비굴성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개의 태도로 인한 도발이 없었더라면 그런 나쁜 뿌리는 맹장과도 같이 졸아들고 기능을 잃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 아닐까.


오늘날 형편으로 보면 개는 비굴하지 않고 살 수 없으니 일종의 보호색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생존에 절대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비굴을 자랑함은 모를 일이다. 저편의 비굴은 나의 위엄과 능력을 시인하는 것이라서 비굴을 좋게 해석하여 주려는 경향이 있다. 사람을 알아준다, 겸손하다, 충직하다 등등의 미사로써 수식하여 준다.


이래서 개가 충성되다는 전설이 생긴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실지로 이야기에 있는 것과 같은 업적을 본 일이 없다. 개도 세상 물정에 따라 변하는 것인지, 충성된 일을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충성될 필요를 잃은 것인지, 여러 모로 궁리하여 보기도 한다. 간혹 충성된 개가 있다고 해서 개란 개는 깡그리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다고 할 것은 못된다. 개 중에도 생이지지(生而之知)하는 놈, 배워서 아는 놈, 배워도 배워도 모르는 놈이 있을 것이 아닐까. 도적을 잡는 데 사람보다 나은 놈도 있지만 도적을 보고 도망치는 놈, 도적을 보고 덕이나 볼까 따라다니는 놈도 있다.

충성되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던가 한번 들인 습관을 고수한다는 것인데 동물은 대개 이런 성질이 있다. 고양이도 주인의 음식은 먹지 않고 닭도 남의 집 닭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개만이 충직하다는 영예를 차지하는 것은 개가 동물 중에 가장 사람을 잘 따르는 것이니까 도의심을 부여하고 만족하는 것이리라. 사람은 진실로 도의적인 창조물임에 틀림없다. 살아서 어떠한 학대에도 반항이 없고, 갖은 욕설을 못 들은 체하고, 몰염치한 주인들의 오물처리도 하며 죽어서 주인의 영양보충까지 하는 이 동물을 한낱 말로 표창하고 시치미떼는 사람의 섭리는 묘절하다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개는 저도 모르는 공이 있다. 법이 있고 경찰이 있어도 남의 집에 예사로 들어가서 은수저, 화초, 세탁물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집어가는 양반들도 ‘명견주의’ 넉 자의 부적만 보면 예의 염치를 차리게 된다. 산 중달을 쫓았다는 죽은 공명과도 같이 개는 신통한 재주를 갖고 있다. 이런 유덕 유능한 동물을 사람들은 ‘개떡’, ‘개수작’, ‘개잡놈’, ‘개차반’ 따위 아름답지 못한 말에 쓰게끔 천시, 조롱한다는 것은 변덕일지는 몰라도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개를 멸시하는 것은 사람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그것이 못한다는 데서 생기는 기분일 것인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것을 보면 감탄한다. 개가 산수를 한다, 말을 알아듣는다, 물건을 사 온다 하는 따위의 일을 극구 칭찬하는 것이 그 한 일이다. 개로서 보면 이따위 짓을 매에 못이겨 부득이 하는 일이거나 조건반응적으로 하는 게 생리에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개가 얼마나 청각과 후각이 날카로운가, 그 외에 사람이 갖지 않은 어떤 신기한 감각과 재주를 갖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개만도 못하다’는 어리석은 말을 우리 머리에서 떼 버려야 할 것을 제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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