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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이유있는 '열공'

7154 2009. 4. 7. 10:19

중년의 이유있는 '열공'



'인문학의 숲'에서 자아를 발견하다

『 한국의 중년층이 '인문학의 숲'에서 인생을 만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국내 경영계에 불어닥쳤던 인문학 열풍이 최근에는 일반인, 특히 중년층으로 저변을 넓히고 있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경제ㆍ경영 전문가들이 경제 위기 해결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인문학을 열쇠로 삼았다면 일반 대중들은 배우는 즐거움 그 자체를 만끽하고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고전ㆍ인문학 강의는 지난 2000년 대학교수와 인문학 연구자들을 주축으로한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시작으로 널리 알려졌다. 최근 들어서는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회, 예술의 전당, 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 서울역사박물관 등 많은 기관이 인문학 강좌의 혜택을 제공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를 듣는 대다수 수강생은 50세 이상 중장년층이다. 그 동안 주부대학이니 백화점 문화센터니 해서 주부들이 강의실을 들락거리는 경우는 허다했지만 주부뿐아니라 머리카락이 희끗한 중년의 신사들까지 수업을 듣는 장면은 진풍경이다.


이들은 왜 인문학에 빠져드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인문학이 중장년층에게 잃었던 자아를 찾아주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한국경제의 성장기에 생계와 자녀 양육 등으로 숨가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당장 돈과 연결되지 않는 인문학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녀들이 성장하고 퇴직하면서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생긴 중년층은 무료해지기 쉬운 여유 시간을 자신을 위한 공부나 투자의 시간으로 적극 활용하게 된 것.


마라톤과 같은 긴 여정을 달려야 하는 인생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삶의 근원에 대한 성찰 등의 기회를 주는 인문학은 중년층을 사로잡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지난달 25일 세종예술아카데미 '정오의 미술산책' 강좌를 들으러 온 권 모(70) 씨와 이 모(65) 씨 부부는 "은퇴 후 함께 문화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며 "매 학기 강좌를 빠뜨리지 않고 듣고 미술전시회, 오페라 등도 열심히 찾아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최근의 인문학 열기에 대해 일각에서는 불황에 따른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회에서 연구강좌 고고인류반을 진행하고 있는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강좌를 열심히 듣는 수강생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건전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특히 경기불황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인문학에 대한 심취를 통해 불안을 벗어나는 힘이나 정신적 위로 등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주 리빙앤조이는 중장년층 사이에 거세게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 속으로 들어가봤다. 한국인 평균수명 80세에 육박하는 고령화 사회의 문턱에서 중년 인문학도들의 학구열은 분명 한국 사회와 문화를 선진화하는 새로운 에너지로 주목받을만하다. 』


● 40~50대 강남 주부, 열풍 이끌어

퇴직한 중년 남성도 가세 '잃어버린 꿈 찾기'

세종예술아카데미·예술의전당 강좌 등 인기

"현실적 어려움 극복 위한 또다른 방법"


박물관이나 미술관 문화 강좌가 중년층 사이에 새로운 지식 습득의 장(場)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문 직업 교육이 아니라 상아탑에서나 접할 수 있던 문학, 역사학, 철학 등의 학문을 일반 대중에게 제공하면서 중년층들이 새삼 '열공 모드'에 빠져들고 있다.


특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년층 사이에 인문학 공부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강남권 중년 주부들의 인문학 열기가 자녀 교육열 만큼이나 뜨거울 정도다. 퇴직한 중년 남성들도 생업에 전념하느라 잊고 지냈던 인문학에 새롭게 입문하며 모처럼 생긴 여유 시간을 즐기고 있다.


■ "부동산, 자식 등수 얘기만 하고 싶진 않아요" 아줌마 치맛바람의 변신


서울 강남 지역에서 접근성이 좋은 예술의 전당 인문학 강좌의 경우 40~50대 강남 주부들이 핵심 수강생이다. 지난달 25일 친구 3명과 함께 세종예술아카데미 '정오의 미술산책' 프리뷰 강좌를 들으러온 최 모(56) 씨는 "요즘 친목 모임 나가면 다들 인문학 강좌 얘기를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문학 강좌 듣는 것이 유행이다 보니 나도 듣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예술의 전당 미술팀 큐레이터 채홍기 씨는 "엄마들이 치맛바람으로 교육을 일으킨 것처럼 강남 주부들의 치맛바람이 인문학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한다.


지난 1977년부터 시작돼 역사가 가장 오래 됐으며 대규모로 운영되는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회는 박물관 성격에 맞게 역사학 위주로 구성된 게 특징적이다. 일명 '박물관대학'이라고 불리는 특설강좌와 보다 심화된 교육 내용을 담은 연구강좌 두 가지가 마련됐다. 매년 400여명의 수강생들이 100여명의 전문강사에게 강의를 듣고 있으며 지금까#?00여명이 강좌를 수료했다. 강남 대치동에서 온 주부 이 모(62) 씨는 "자식들 다 키워 놓고 나니 일상이 너무 심심했다"면서 "이번 강좌가 고상하고 품위 있게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친구의 소개로 이번에 등록했다"고 전했다.


올 상반기 세종예술아카데미, 리움, 예술의 전당 등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한 서양미술사 강의를 하는 노성두 교수는 "50대 이상이 되면 이제 더 이상 부동산 얘기, 자식 등수 얘기나 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 교수는 "올 상반기에만 8개의 대중 강좌를 하고 있는데 모두 40~50대의 참여 비중이 높다"며 "이들 중 상당수가 5년 이상 인문학 수업을 들었고 독서와 해외여행 등을 통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보니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갈증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 "생애 최고로 행복해요" 아저씨 바짓바람까지 가세


지난 6일 삼성미술관 리움에서는 '모더니즘의 시작, 다시보는 서양근대미술사'를 주제로 한 대중 강좌가 개강했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가 맡은 첫 수업은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보여줬던 모더니스트 마네에 대한 조명. 이 수업에 참가한 허단(62) 씨는 "재작년 은퇴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이 리움 인문학 강좌에 등록한 것"이라며 "내 삶에 예술이 녹아든 지금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30여년간 공직생활을 했던 그는 "현직에 있을 때는 일만 하느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과학으로 산업이 발전을 이루듯 예술로 내 삶이 발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허 씨는 매주 금요일 분당 집에서 1시간 이상 걸리는 리움에서 2시간 동안 강의를 듣는다. 수업이 없는 날은 한 주 간의 전시회, 음악회 소식 등을 검색해 관심있는 프로그램을 예매한다. 틈틈이 갤러리와 박물관 등도 찾아다닌다. 그는 "이러니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나온다"며 활짝 웃었다.


2년전 오랜 직장생활에서 벗어나자마자 인문학 공부에 빠져든 김 모(65) 씨에게 인문학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꿈"이다. 김 씨는 "대학 입학 당시 돈이 되는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가장 좋아하던 역사를 포기하고 공학 전공을 택했다"며 "은퇴 후 본격적으로 역사, 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노년에 꿈을 되찾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회 특설강좌 담당자인 서승연 씨는 "강의가 오후 시간대에 진행되다 보니 주부 수강생이 많아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체 수강생 중 남녀 비율이 2대 8 정도였는데 올해는 남자 수강생이 전체의 40%에 달할 만큼 증가 폭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 3일 개강일에 만난 최 모(60) 씨는 지난해까지 모 대기업 임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했다. 최 씨는 "퇴직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여유 시간을 보내기 힘들었다"면서 "먼저 퇴직한 동료로부터 이 곳 역사 강좌 구성이 좋다는 권유를 받고 등록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불황에도 아랑곳 없는 중년층의 지적 욕구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회의 특설강좌 수강생 425명 가운데 대졸자 이상은 389명으로 고졸 이하인 36명보다 10배 이상 많은 것으로 조사돼 상대적으로 고학력자들이 인문학 강좌를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부는 물론 교수ㆍ공무원ㆍ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나 퇴직한 중년 남성 등의 참여가 늘면서 인문학 강좌는 불황마저 비껴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회의 40만원 짜리 특설강좌(연간 400여명)나 리움의 20만원 상당의 강좌(연간 500여명)도 모두 조기 마감됐으며 일부 수업은 수백 만원씩 들여 해외 답사를 떠나지만 이 또한 신청자가 넘칠 정도다. 예술의 전당 인문학 강좌는 2005년 겨울 첫 학기에는 60명 정원이었으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 2006년부터 대형 강의실로 옮겨 정원을 150명으로 늘렸지만 금, 토 강좌는 수강신청 기간이 시작되기 무섭게 마감 행진을 벌인다.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의 문화 강좌는 지역별ㆍ문화권별ㆍ국가별로 주제를 선정한 심화 과정이다. 올해는 '동남아시아 이야기'에 이어 '동유럽 이야기(5~7월)'와 '아프리카 이야기(9~11월)'가 차례로 진행된다. 올해 강의를 맡은 신윤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강좌 내용이 타 문화권에 대한 내용이 많은 만큼 전공 학생들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가정주부나 환갑을 넘긴 어르신 수강생이 많아 중장년층의 지적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인사동 길담서원 대표 박성준 성공회대 NGO학과 교수는 "요즘 같은 불황에는 근원을 탐구하고 내면을 닦는 인문학이 빛을 발한다"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적 근원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필요하면 현지 답사도 간다


인문 강좌를 수료한 후 해외 답사까지 다녀오는 프로그램들도 활성화되고 있다. '있는 자들의 사치'라는 부ㅐ옙각덫옛平?않지만 수강생들은 단순한 해외 여행보다 훨씬 유익하고 바람직한 풍토라고 반박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회는 기부ㆍ특별회원(연회비 70만원)을 대상으로 매년 한 차례씩 해외 문화 답사를 실시하고 있다. 문명의 발생지, 해외 박물관, 주요 유적지 등을 둘러보는데 지난해의 경우 동ㆍ서양 문화의 교차지인 터키를 답사했다. 총 3차례에 걸쳐(2~4월) 12일씩 진행된 답사에는 매번 20여명이 참여했다.


한국문명교류연구소는 올 3월부터 '문명담론과 실크로드 현장 강의'를 마련했다. 이랑 연구원은 "지난 2월에는 실크로드 여정을 따라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 3국을 보름 정도 답사했는데 13명 정도 참여했다"면서 "환율이 올라 1인당 600만원 수준의 높은 경비가 들었지만 답사 공고를 내면 금세 마감될 정도"라고 소개했다.


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실크로드 강좌 뿐아니라 인문학습원의 신화학교 등을 모두 수료한 홍금자(64) 씨는 교수들과 함께 몇 차례 해외 답사를 다녀왔다. 중학교 교사 출신인 홍씨는 "환갑을 넘겼다고 지적 욕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라며 "비용이 좀 비싸지만 역사의 중심지에 발을 딛고 교수님 설명을 들으면 강의 내용도 곱씹을 수 있고 역사 속 내용이 피부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늘어나는 인문학 강좌…일시적 유행 아닌 듯


에어로빅, 꽃꽂이 등 취미 강좌 일색이던 구민회관, 지역문화원 등에서도 지난해를 기점으로 인문학 강좌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강남구청 강남문화원, 마포구청 평생교육센터 등은 석경징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홍승찬 예술의 전당 총감독,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등을 초청, 구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문예술 강좌를 폭넓게 마련했다. CEO 대상 최고위 인문학 강좌인 AFP(Ad Fontes Program)를 운영했던 서울대는 이르면 오는 5월부터 일반인을 위한 '서울대 인문 강좌'를 개설할 계획이다. 서울대의 이런 시도는 위기를 맞고 있는 인문학 분야에서 대중 지향적인 주제를 적극 발굴해 대중과 만나는 지점을 만들겠다는 의도다.


'인문학의 위기'를 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인문학의 붐'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우려의 시각도 있다.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2'의 저자인 정진홍 씨는 책 서문에서 "사람들이 인문학을 흥행의 대상으로 혹은 유행하는 그 무엇으로 생각할까 두렵다"고 했다. 냄비처럼 확 끓었다 금세 식는 현상은 인문학 정신, 즉 '후마니타스 스피리투스(humanitas spiritus)'에 반하는 것일뿐 아니라 겨우 살아나는 인문학을 다시 죽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우려에 대해 윤금진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 소장은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높아지고 있는 중장년층은 오랜 기간 '배움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있다가 새롭게 인문학에 심취하고 있는 만큼 이런 추세는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민정기자 jminj@sed.co.kr

서은영기자 supia927@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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