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문득문득

[수필], 이렇게 써라_이승훈

7154 2012. 9. 12. 11:09

 

 

 

예술성의 부재는 수필이 아니다

 

 

                    이승훈(해드림출판사 대표_수필계 발행인)




1. 들머리


주변을 돌아보면 수필가들이 오히려 수필을 문문하게 생각하는 의외의 경우를 본다. 이는 수필을 문학으로써 경시해서가 아니라 매너리즘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싶다. 이는 문(文)의 영역 확대로 수필적 상황이 느슨해져 긴장감이 떨어진 탓도 있을 것이고, 속도 지향의 디지털시대를 적응해가면서 문학에서조차 엿보이는 우리의 심리적 단면일 수도 있다.

논리의 오류와 모순이 존재할 수 있음을 전제하면서도 이하의 소고(小考)를 통해 수필의 범위를 축소 설정하여 좀 더 긴장된 시각으로 수필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리고 요즘 붐이 일다시피 등장하는 우리의 새로운 어휘가 갖는 의의 및 처우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견지에서 간략히 짚어본다.


2. 좋은 글과 좋은 수필


수필가가 쓴 ‘좋은 글’이라 해서 반드시 ‘좋은 수필’은 아니다. 어렵긴 하지만‘좋은 수필이다.‘라는 평가 자체를 나는 아껴서 내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좋은 글’은 수필을 포함한 아주 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글(여기서 글이라 함은 수필 모양의 일반적인 산문으로 국한해서 살핀다.)과 수필은 구분해야 한다. 독자에게 감동이나 교훈 기타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글’에는 수필뿐만 아니라 수기나 일기, 편지 글, 칼럼, 독후감, 감상문 등이 들어가 있으며 이런 글을 우리 수필가도 쓴다. 그러나 예컨대 수필가가 쓴 탁필(卓筆)의 서간문이라 해서 무조건 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얼개가 탄탄하고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선명하며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을 갖추고 있어도 전혀 수필이 아닐 수 있다. 단순한 사유를 붓 가는 대로 물 흐르듯 풀어 간 글도 마찬가지다.

어떤 매체를 통해 수필가라는 지위를 부여받았으니 우리가 쓴 글은 모두 ?수필이다.?라는 판단은 한참 잘못이다. 다시 말해서 등단(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고 해도)과 수필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다. 소위 수필가가 수필이라고 내놓은 글 가운데는 수필의 태를 본 딴 일반적인 산문에 불과한 글이 허다하다. 자신이 주장한다고 해서 인정되는 수필이 아니다. 수필의 생명이 무엇인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리고 그 생명을 창조할 노력이 아쉬우면서도 자신의 글을 함부로 수필이라고 고집한다면 이는 수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좋은 글을 쓰며 겪는 고통과 수필을 쓰며 겪는 고통은 그 차원이 다르다. 나 역시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은 하지만 아직 좋은 수필에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수필가’라는 명칭을 붙이는 데는 ‘등단하는 과정을 거쳤다.’라는 의미와 수필가를 ’지향한다.‘라는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내가 지금까지 수필이라고 쓴 글에 누군가 ’당신 이거 수필인가?‘하거나 ’왜 수필인지 설명해봐!‘한다면 나는 진땀을 흘리게 될 것이다.


3. 좋은 ‘수필’은 무엇인가


수필은 문학이요,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해도 예술성이 없으면 문학이 아니요, 문학성이 없으면 설령 작고하신 피천득 선생이 쓴 글이라 해도 수필이라는 명예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필의 형식을 갖춘 글 가운데 예술성 즉 문학성이 제고(提高)된 글?이 ‘좋은 수필’이다.

여기서 문학의 예술성에 대한 고찰은 필요에 따라 잠깐씩 언급하는 이외에 전체적인 부분은 논외로 한다. 문학, 특히 수필의 예술성 자체를 개념 짓거나 논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서는 이미 훌륭한 선학들이 적잖은 이론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론을 전제로 ‘수필은 문학이고 문학은 예술이다. 고로 수필은 예술이다.’라는 단정 아래 이하 모든 내용을 서술한다. 그리고 예술 즉, 문학은 절대평가가 있을 수 없다. 수필 역시 예술이므로 ?수필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런 수필이 좋다, 저런 수필이 좋다.‘라고 절대평가를 내릴 수 없듯이 이 내용도 수필가 개인이나 작품 성향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수필은 문학이요, 문학은 예술이거늘 그 예술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겠는가.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야 등단하자마자 써내는 결결이 예술성을 지닌 수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평생 수필이라고 써서 발표를 하지만 엄격히 털어보면 예술성을 지닌 수필은 단 한 편도 없을 수 있다. 가치판단은 상대적이므로 높낮음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필에는 수필로써 명예를 부여할만한 예술성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이 간단명료한 부분을 빠트리고 있다. 글을 써놓고 무의식적으로 이것은 수필이다 생각하지만 ?예술성이 없으면 수필이 아니다.?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머뭇거리게 되는 경우가 적잖다.

수필가든 아니든 자신이 쓴 글을 수필이라고 부치려면 그 글에 예술성이 있는가를 먼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적어도 이 글 어느 면에서 나는 문학적 가치 또는 예술적 가치를 제고하였다.‘라고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다면 감히 수필이라고 이르는데 겸손해 하자. 왜냐하면 예술성이라는 혼을 불어넣는데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적 가치가 있어야만 자신의 글이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요, 수필이 아닌 ’좋은 글‘로써 충분한 공명을 낼 수 있고 또한 문학 외적 가치에서는 더 높이 평가될 수도 있으므로, 굳이 수필이 아닌 글을 수필이라고 우기지 말 것이며 특히 수필가라 칭하는 우리는 자신이 쓴 글을 무조건 수필이라고 단정 짓지 말자는 청(請)을 넣는다. 단지 문인의 지위를 얻었다고 해서 자신이 쓴 글을 모두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수필을 지도하는 곳에서는 글쓰는 기술이나 어법 같은 국어는 배울지 몰라도 예술을 창조하기 위한 고뇌를 배우지는 않는다. 창작의 기술성은 이론이나 토론이 길라잡이가 될 수 있으나 사유와 언어의 조탁(彫琢)이 따르는 예술성은 마치 ‘강’에 관한 수필을 쓰기 위해 그 강가에 움막을 짓고 몇 달을 몸부림하는 것처럼 대상과의 처절한 투쟁이나 자신과의 혹독한 싸움에서 얻어진다. 설령 상상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따뜻한 방에서 배를 깔고 술술 풀어낸다고 하더라도 이를 수필로 승화(예술성 부여)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신적 질곡이 배어야 문학성의 흔적이나마 인정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수필을 쓰려는 우리는 문학 내지 수필 이론을 자주 접함으로써 나름대로 수필에 대한 예술성의 개념을 정립하고 자신의 글 안에서 끊임없이 그 예술성을 추구해야 한다. 수필이 이런 식으로 엄격히 제한될 때 비로소 수필의 가치와 격이 높아진다. 예술성이 충분히 제고되어 있는 바에야 누가 수필을 헐뜯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컨대 설혹 유명 평론가나 원로문인이 썼다 하더라도, ‘예술성이 없으면 수필이 아니다.’

수필은 예술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의 부접(附接)성으로 인해 우리가 쓰는 글에 너무 안이하게 수필이라는 미명을 붙이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쓰는 대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천재가 아닌 이상, 예술성을 불어넣기 위해 우리는 혼신의 힘을 쏟으며 충분히 고통스러워하느냐 자성하면서….


4. 어휘와 문학


문체를 구성하는 어휘를 선택함에 있어서 나는 순 우리 어휘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우리 어휘를 더 귀하게 여길 뿐, 문학이라는 테두리에서 표현의 영역이 넓거나 넓은 표현의 영역을 함축해주거나 운율적인 한문 어휘가 있다면 굳이 이를 배척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자고로 문인은 ‘우리’글 자체를 매개로 행복과 사랑과 명예와 재산을 얻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문인은 ‘우리글’이 주는 수혜의 폭이 넓은 사람들이다. 문인은 따라서 우리글을 보호양육 할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 알천 같은 우리 어휘가 건강을 잃고 시들어 있는데 이를 모른 체 한다면 문인으로서 얀정머리 없는 짓이다. 문인은 우리가 찾아내고 돌보지 않아서 유기되고 파괴된 우리 언어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고 건강하게 세워야 하는 언어의 치유사이기도 하다.

어휘 자체가 수필의 예술성을 높이지는 않아도 어휘나 문체의 운율성을 고려하면 우미한 어휘 선택 또한 중요하다. 문학의 예술성 즉, 문학성을 일러 ‘언어를 매체로 한 미적 창조와 미적 표현 행위’라고 했을 때, 이미지의 형상화 같은 미적 창조나 미적 표현은 다름 아닌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문체를 구성할 풍부한 어휘력은 바로 문학의 밑절미라 할 수 있다.

평범한 어휘로 얼마든지 문학성을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은 틀림없는 말이다. 반면 ‘대한민국 문인’이라면 현재 유기된 언어를 살려 쓴다고 시비할 일도 아니다. 생소하다는 이유로 곧장 ‘어려운 어휘’로 치부하면 우리는 문학적인 어휘를 놓칠 수 있다. 글을 읽다가 생소한 어휘가 튀어나오면 이를 눈치 주거나 사전을 찾아보기 귀찮아 대충 넘겨버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사전을 찾아 지적 욕구를 해소하는 자세가 글을 쓰는 우리에게는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따라서 수필가로 등단을 하면 글을 쓰든 수필을 쓰든 먼저 우리나라 국어대사전부터 구입하기를 권하고 싶다. 산문 문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수필가는 국어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살듯해야 한다. 4~50년 동안 문인의 길을 걸어온 원로들도 방대한 우리말 대사전을 늘 곁에 두고 사는데, 하물며 우리는 생소한 어휘 몇 개 나왔다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엉뚱한 해석을 해서는 곤란하다.

언어의 표현으로 예술성을 나타내는 문인이 스스로 어휘 감각을 둔화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일상적인 어휘의 매너리즘도 벗어나야 한다. 신선한 공기를 유입하듯 너무 자주 사용해서 물린 어휘를 대체할 새로운 어휘를 찾고 연구하는 자세가 우리에게는 더 필요하다. 영어 기타 외국어 어휘는 밥 먹듯이 암기하면서 왜 우리 어휘는 암기하려 하지 않는가. 국어사전에도 손때를 묻혀라. 너덜너덜해진 영어사전보다 너덜너덜해진 국어사전이 더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우리 국어사전에는 평생 글을 써도 찾아내지 않으면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할 주옥같은 어휘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이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들을 누가 꺼내 줄 것인가. 국어학자는 아니지만 문인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므로 낯선 어휘라 하여 이를 경계해서는 곤란하다.


5. 메지 내기


전혀 수필이라는 인식 없이 써 온 글이 어느 날 등단을 하였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두 수필로 변하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수필이라고 써오면서도 수필의 맥을 못 짚는 아니 짚어내려고 노력마저 덜 하는 글을 대하면 안타까움이 일렁인다. 아직도 이러한 수필의 문학성 타령을 하려니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진부한 느낌조차 든다. 그러나 수필은 그만큼 어렵다. 글을 쓰는 기술은 늘어도 수필 쓰는 기술은 쉽게 안 는다. ‘예술성이 없으면 수필이 아니다.’라는 분명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는 자신의 글에서 예술성을 추구하려는 고생을 안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앞에서 밤새도록 자판을 두들긴다고 스며드는 예술성이 아니다. 우리 수필가는 예술의식이 부족해서 쉽게 쉽게 그리고 성급하게 펜과 사유를 놓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펜을 쥐고 있을 수 없는 마지막 한계를 느낄 때 예술성은 수필 안으로 슬며시 배는 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창작은 수필가로서 기본이며, ‘수필’을 쓰려고 고뇌하다 보면 ‘예술’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수필가는 예술가이다. 예술성 판단이 절대평가일 수 없다 하더라도 예술성이 없으면 수필이 아니다.

인터넷 문화의 발달로 우리 언어가 해체되고 파괴되는 모습을 본다. 이런 가운데 적잖은 수필가가 그동안 묻혀있던 예쁜 우리 어휘를 곰비임비 찾아내고 자신의 작품에 활용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처음에는 낯설어 해도 금세 친숙해져 사용되는 것이 우리 어휘다. 이미 ‘우리말 살리기 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우리말 겨루기 대회를 자주 방영한다. 일반인도 그만큼 우리말에 관심을 기울여 실력을 뽐내는 마당인데 우리말과 동고동락하는 문인의 어휘력이 일천해서야 되겠는가. 늘 국어사전을 가까이 하며 자신만이 잘 쓸 수 있는 어휘 한 권 정도는 적바림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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