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JOCKEY★★

돈이 술 푸게 한다

7154 2013. 5. 18. 09:26

돈이 술 푸게 한다

이승훈

 

 

 

사무실 조용하기가 산중 절간이다.

김용진의 [돈의 진실]을 다시 한 번 읽고 있다.

자정이 가까워져 올수록 책장 넘기는 소리며 숨소리 공명이 커진다.

평화로운 지경, 고요….

하지만 지난 그때는 고요함이 분심의 파도요,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날름거리는 어둠의 혀였다.

당시는 밤마다 습관처럼 죽음을 떠올렸다. 간신히 숨만 붙어 깔딱거리며 살아온 지 몇 년째을까. ‘지금 죽으면 숨이 끊긴 내가 발견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생각하니 죽음은 지척이요, 외로움의 거리는 참 멀기도 하였다. 명줄을 끊는다면 사무실보다 두 평도 채 안 되는 창문 없는 욕실이 적당해 보였다. 소주 두어 병, 연탄 두어 장이면 넉넉하지 싶었다. 테이프가 필요 없을 만큼 간단히 밀폐된 공간, 불을 끄면 뚜껑 닫힌 관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다가올 내일이 두려워 잠을 쉬 이루지 못하였다. 아침이면 내 영혼은 햇볕 아래 나팔꽃처럼 쪼그라들었다. 대죄라도 지은 이,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결제일 며칠 전인데도 그들은 내가 혹여 자살이라도 하였을까 봐, 야반도주라도 하였을까 봐 미리 확인 차 아홉 시만 되면 전화질을 해대는 거 같았다. 아니 할 말로, 젊은 자식 둘을 거푸 잃은 노모만 없다면 티끌만큼 미련도 없이 사라질 세상이었다. 카드 회사들, 은행권들, 제2금융권, 제3금융권, 모든 거래처, 사적인 그 관계들…. 매월 돈 갚을 날들은 그야말로 정신 못 차리도록 찾아왔다. 아무리 하석상대(下石上臺)를 해도 밑 빠진 독에 불 붓기가 따로 없었다. 사방천지 마음 둘 곳 하나 없었다. 피붙이처럼 도와주던 이들에게도 그저 무기력하게 인사만할 뿐, 속내도 쉬 털어놓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든 내 속내는 민폐였다. 오직 당신만이 내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때 나는, 수십 년 동안 거의 매일 소주 두어 병을 마셔대던 술을 끊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후가 되어도 전날 마신 술 냄새가 안 가시던 당시였다. 인생이 가장 바닥이었을 때, 그래도 살고 싶다는 의지였을까.

 

 

그즈음이었다. 일요일 저녁때가 다가오던 시각, 인터넷 기사 하나가 목에 걸렸다. 기사를 읽어내려 가자마자 마음이 격해지더니 마구 눈물이 쏟아졌다. 콧구멍, 귓구멍으로조차 눈물을 쏟아낼 듯하던 나는, 끝내 소리쳐 꺽꺽 울어댔다. ‘내가 왜 이러나…, 내가 왜 이러나… 하면서도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빈 사무실에서 한참 신음을 토하며 꺽꺽대다가 간신히 묵주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차마 저녁을 먹을 수가 없어서 한 끼는 건너뛰기로 하였다.

 

 

‘가난 때문에… 30대 가장이 부인·딸 앞에서 지하철 투신’

생면부지의 자살 소식 앞에서 목을 꺾으며 울어댄 것이다. 돈이 없어 전철로 뛰어든 그가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아내도 가엾고, 어린 딸도 가여웠지만 홀로 감당해야 할 그 십자가가 더없이 가엾었다. 죽도록 시달렸을 두려움, 외로움, 슬픔, 절망이 고스란히 밀려왔다. 어쩌면 그를 통해 나 자신이 가엾어 그리 펑펑 울었을지도 모른다. 육신을 빠져나온 내 영혼이, 처참하게 망가진 육신을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듯하였다. 다섯 살 딸이 보는 앞에서 투신한 그를 두고 험한 말들이 오가기도 하였으나, 이미 넋이 나가버린 그에게 무슨 이성을 바라겠는가.

 

 

역곡천을 따라 걸으며 그 영혼을 위해 두어 시간 동안 묵주기도를 바쳤다. 가로등만 듬성듬성 서 있는 어둠 속 천변을 걷자니 헛것이 어른거리며 두려움이 옴쏙하게 따라붙었으나, 미나리꽝에서 울어대는 개구리도, 멀리서 짖어대는 개들도, 하늘에 박힌 초승달도 위로자 삼아 앞세우며 걸었다.

 

 

초등학생이 교무실로 불려 가 야단을 맞듯, 건물 주인에게 불려 가 밀린 임대료를 갚지 않으면 사무실을 빼겠다는 각서를 굽실거리며 쓴 이후로도, 한동안 긴 터널 안으로 비끼는 빛이라고는 없었다. 눈을 감고 도심의 거리를 걷는 듯 여전히 아득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희끗희끗 빛이 샜다. 잠깐 그러다 말지 아니면 이대로 벗어나게 될지 모를 일이었지만 눈을 떴을 때 다가오는 평화, 아무 일 없는 하루가 부활하는 목숨 같았다. 그런 즈음 만난 출간 원고가 김용진의 [돈의 진실]이다.

 

 

 

서울대에서 천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여의도 유명 금융권에서 일하며 이 책을 썼다. ‘돈 이야기’라서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 원고였다. 나를 그리도 소인배로 만들어 버린(貧者小人) 돈. 이 원고를 다루면서야, 나를 죽음으로 내몰려고 안달하였던 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하나도 틀린 데가 없는데, 그리 당하면서도 나는 왜 그 적(?)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김용진의 [돈의 진실]에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할 만큼 고정관념을 타파시켰다. 덕분에 돈에 대한 치열한 인식이 좀 바뀌었다. 돈에 대해 고급스러운 정보를 알면 그 돈 앞에서 품위가 지켜질 것이요, 그저 천박한 거시기쯤으로 알면 자신도 돈 앞에서 그럴 것이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보다는, 돈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일이었다.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15만 원짜리 월세방, 오토바이 택배 기사로 일하다가 교통사고로 허리 부상, 간신히 설립한 오토바이 택배회사 빚으로 부도, 막노동 시작, 허리 통증 도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그리고 술’

 

 

전철로 뛰어든 그의 막막한 처지였다. 그때 어디서 단돈 백만 원만 생겼더라면 그는 잠깐 심호흡하였을 테고, 그러면 그는 생명을 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절박한 이들에게는 백만 원도 목숨 값일 수 있다.

돈의 존재가치는 빚이다. 빚이 없으면 돈은 의미가 없다. 갖은 협박을 다하며 지능적으로 괴롭히고, ‘신체 포기각서’를 받고, 성매매를 강요하고, 장기를 적출하여 내다팔고…. 덜 성숙한 자본주의사회일수록 빚을 진 이들에게 가혹할 것이다.

 

 

아파트 단지를 돌며 우유 판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판촉 프로들은, 아파트 한 계단을 따라 위에서부터 1층까지 내려오며 움켜쥔 우유 신청서가 수북하지만 어떤 이는 온종일 돌아다녀도 신청서 하나 받아오지 못한다. 일과가 끝나면 판촉사원들은 실적에 따라 수익하는데, 이때 프로들은 자신이 영업한 우유 신청서를 영업 실적이 없는 이에게 나누어주어 적당한 수익을 얻게 한다.

김용진의 [돈의 진실]을 다 읽고 난 다음 내 생각은 그랬다. 신체 건강하고 머리 좋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 건강하지 못해 혹은 능력이 미약하여 돈을 벌지 못하거나 잘 벌지 못한 사람들에게 좀 나누어 주며 사는 사회가 진정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힘 있는 이들이 약자를 위해 기꺼이 멘토(Mentor)가 되어 주는 세상이 참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해드림출판사를 그런 도구로 쓰이게 할 원고를 대하며 또 기다린다. 당신께서 단 한 사람의 근심이라도 구할 능력을 주신다면, 그것이 가장 큰 은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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