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JOCKEY★★

김홍표 시집 [여름지다],

7154 2013. 5. 28. 15:33

 

 

김홍표 시집 [여름지다], 여름이 떠난 후 남은 여운들
 
 
 
1.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서
 
 
여름이 지난 자리에서 알곡처럼 여문 시를 모아 엮은 [여름지다], 김홍표 시인의 세 번째 충만한 삶의 시집이다. 여름이 지나간 사이로 비끼는 청매실 같은 시들이 구도성求道性을 지녔다.
조금도 무게를 입히지 않는 평상복 차림의 시들이지만 道가 없이 作이 있었으랴. 땀 냄새나는 지나온 순간순간들이 그 길을 따라 [여름지다]로 순하고 알차게 들어찼다.
 
산다는 것은 미세한 걸음마다/태초 소리바람 지날 때/작은 솔잎으로 몸서리치는 것/이마는 달아오르고 흥분한 계곡은 젖어오는……//산다는 것은 /시나브로 바람같이 흐르다 산산이 쪼개진/별의 갈증, 이윽고 어두운 방 드러누워/깊이 잠들기 전에 꾸는 젖은 풀숲/그런 그리움 아닌가(산다는 것은)
 
모든 일손을 놓은 채 바람 따라 들판을 걷고 싶은 충동, 감성의 신선한 충격이다. 마치 도가 사상이 밴 듯한 이 시들이 사람을 숲으로, 구름 아래로 끌어당기고 눕힐 것 같다.
자연을 터 잡아 쓴 유정한 시들이 세상을 훨씬 부드럽고 여유롭게 한다. 이를 통한 자아 성찰이 사람의 그것보다 더 순수하고 맑고, 더 진솔하기 때문이다.
 
 
2. 자연에는 자유의지가 없다
 
밤비 다녀갔다/마르던 산길/덕분에 한숨 돌렸다/이어진 밭에/고랑 치고/성긴 이랑에 씨 뿌렸다//수묵화 한 폭/새벽 동산에 걸리고/마지막 뜨겁던 하루/벌써 갔구나//아카시아 숲에서
꿩 울었다/뒷산에 길게 울던 매미/땅바닥에 잦아들고/정말 갔구나//수수밭 모가지 기울고/아무렴, 나도/여름 한 광주리 담아가야지/목덜미 닿는 볕/아직 뜨거운 날(여름지다 전문)
 
하느님의 섭리로만 움직이는 자연에는 인간과 달리 자유의지가 없다. 자연의 성찰에 시인의 자유의지를 들이대면 시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김홍표 시인은 이 자연을 내버려둘 줄 안다. 비틀고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온전한 흐름을 읽고 밝혀낼 줄 안다는 것이다. 오랜 신앙생활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향기처럼 시인의 시에서도 잘 익은 시어의 결들이 곱고 향기롭다.
 
시는 혼자 쓰되 시집은 독자와의 공저이다. 시력 동안 독자와 동거하게 되면서 시인의 작품들은 철저히 나비질된다. [여름지다]에서 비끼는 이미지들은, 그래서 여느 시들처럼 모호한 것이 아니라 선명하고 투명하다. 또한 삶의 고독을 대비한 시적 메타포가 시적 감흥을 선양한다.
 
 
3. 김홍표 시인
 
김홍표는 꿈과 회귀에 시달리는 막막한 존재의 상像을 그려나가는 시인이다. 떠나서 머물다가 다시 떠나는 바람의 시를 쓴다. 서두르지 않고 발성하는 어조語調에 깃든 ‘사무침’의 절절한, 그러나 고성高聲으로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 내면의 소리가 있다. 그는 심혼心魂의 일렁임. 그 파문으로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그의 그리움과 사랑의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이며 민족과 자유 그 자체이기도 하다.(시인 윤강로)
2008년 계간 「문장」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는 바람이 될거야』(2005, 북랜드), 『뒤란에 서다』(2007, 북랜드), 『여름지다』(2013, 해드림출판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