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보도자료★★

아버지 세대 치열한 성장소설 [땡크노미], 대상과 금상 독후감

7154 2014. 2. 10. 10:47

 

 

 

[당선작 대상]

소년들의 해피엔딩

이연지

 

 

 그림 형제가 19세기 독일에서 구전되어 오던 민담을 수집해 출간한 『그림 동화』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어느 소년에 관한 동화가 한 편 수록되어 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평생의 소년인 소원은 이를 위해 온갖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한밤중 높은 종탑에 홀로 올라 종 치는 일을 맡는 것을 시작으로, 일곱 명의 사내들이 교수형을 당한 나무 아래서 홀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마침내는 저주받은 고성에서 사흘 밤을 보내는 일에 자원하기도 한다. 이제껏 살아나온 사람이 없었다던 그 성은 사악한 악령이 들끓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곳에서 악령들을 하나씩 퇴치해가며 사흘 밤을 무사히 넘겼을 뿐 아니라 그들이 지키고 있던 엄청난 보물까지 넘겨받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성을 구한 공을 인정받아 공주와 결혼한 소년이 젊은 왕이 되는 것으로, 동화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그리고 여기, 역시 두려움이라곤 모르는 한 무리의 소년들이 있다. ‘서울내기의 치열한 성장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작가 김영태의 작품 『땡크노미』의 등장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그려내는 소년들의 치기어린 모험담은 동화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땡크’처럼 저돌적인 이들의 소년기의 끝엔 일국을 구하는 업적도, 공주와 맺어지는 영예도 없다. 통행료를 빙자해 행인의 주머니를 털다 파출소에 출두하고, 슬쩍한 친구 누나의 수영복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며(그리 애지중지하던 사진을 결국 월남으로 보내는 위문편지에 눈물을 머금고 넣어 보내게 되긴 했지만), 막걸리 한 말과 맞먹는 농축 원액을 마시고는 저승 문턱을 밟고 돌아오질 않나, 독서실 대신 공사판에서 하루를 보내고 손에 들어온 거금에 벅차하기도 하고, 차비 한 푼 없이도 여름방학 내내 마석의 수동이나 청평, 양수리를 종횡 무진하는 주인공이자 화자를 위시한 이 소년들에겐, 두려움을 모른다기보다는 오히려 작품 내에서 빌려 온 ‘겁을 상실’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성 싶다.

 

 부제의 ‘서울’이라는 구체적 지명이 드러내듯, 작품의 배경 역시도 동화 속 공간과는 무관한 생생한 현실 세계이다. 그것도 보물이 그득한 공주의 궁전과는 양 극단에 자리한 듯한 판자촌, 그 곳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동생들과 자라난 주인공이 살아간다. 그 판자촌을 벗어난 이웃에 위치한, 번듯한 집문서가 존재하는 친구네 집. 그 집 내실 한가운데에 달려있는 전등불도, 저녁상에 올라온 이밥에 생선조림이나 돼지 양념 불고기 같은 호사스러운 반찬도, 심지어 시멘트바닥에 하얀 석회를 칠한 깨끗한 변소마저도 주인공에게는 그의 삶에 부재하는 아버지를 환기시킬 뿐이다. 한동안 소식이 끊어진 아버지만 바라보았다던 주인공의 어머니는 이제 넝마 수집상에서 사들인 천을 잘라 작두로 잘라 만든 ‘보로’라는 물건을 팔아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힘쓴다. 주인공이 시험 기간에나마 잠 쫓는 약까지 먹어가며 학업에 열중했던 것은 바로 이 홀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곤궁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주산 학원에 등록하겠다는 주인공의 등록비를 선뜻 마련해주고, 심지어 진즉 주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의 존재는 주인공의 암울한 소년기를 이끄는 환한 빛이다. 어느 날 이불 홑청을 밟다 드러난 어머니의 하얀 허벅지에서, 후줄근한 옷차림, 김치와 된장 냄새로 가려져 있던, 즉 ‘어머니’로서의 모습 뒤에 감춰져 있던 그녀의 눈부신 청춘을 엿본 주인공은 문득 그녀를 위해 세상을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어머니가 기꺼이 내던진 청춘의 가치, 희생의 무게를 짐작한 탓일까. 조개섬에서의 목숨을 건 도강(渡江) 와중에 주인공은 외친다. 엄마, 엄마, 난 해내고 말 거라고. 주인공을 지탱시켜 백사장에 이르게 한 그 절규는 주인공이 회고하듯 그를 살린 희망의 주술이었다. 어머니의 믿음을 상기하고 그 기대에 부합하겠다는 언약의 주문. 그 뒤 삶에서 수없이 마주했을 치열한 위기와 도전의 순간마다, 어떤 마법보다도 강력하고 따스한 어머니의 존재가 주인공을 또 다른 성장으로 이끌었으리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코 동화 같을 수도, 동화가 될 수도 없는 주인공의 모험담은 이처럼 삶의 명암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기에 더욱 현실적인 색채를 띤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 죽음이 있다.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겪는 죽음은, 그가 취중 혹은 몽중에 대면한 다소 익살스러운 저승사자를 제외하면, 동화 속에서처럼 인격이 부여된 환상적 존재이거나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니다. 현실 속의 죽음은 삶의 일부이자 이면이다. 위문편지로 연을 맺어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월남전의 전 하사는 어느 날 한 장의 전사 통보가 되어 주인공을 찾아온다. 술에 취해 선로에 누웠다가 변을 당한 동네 노인의 죽음은 주인공에게 학교 건물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비행기의 추락보다 더한 충격을 안겨준다. 그 죽음을 애도한단 명목으로 술을 마시러 가는 길, 공사장을 지나는 주인공의 머릿속에 문득 그가 만난 공사판의 인물들이 스쳐지나간다. 그들이 영위하는 고단한 삶과, 꼭 공부를 마칠 것을, 그래서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던 한 인부의 당부를 떠올리는 것이다. 지척에 놓인 사(死)와 대조를 이루는 생(生)의 선명함을 통해, 소년은 삶에 대해 성찰하고 또다시 한 걸음 성장한다. 그렇게 한 뼘씩 이루어낸 소년의 성장이 바로 동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이 모험담만의 찬란한 해피엔딩이다.

 

 작품 속에는 소년의 성장기와 교차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 또한 등장한다. 1967년 서울 신당동 판자촌의 C46 수송기 추락 사건을 비롯하여, 월남전, 에티오피아 황제 하이레 세라세의 내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등등. 숭인동의 무허가 판잣집을 헐어낸 자리에 5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청계천이 아스팔트로 덮인 위에는 고가도로가 세워진다. 『땡크노미』는 이 거대하고 서로 무관해 보이는 역사상의 지점들을 연결 짓는 한 개인의 성장기인 동시에, 급속한 발전의 흐름 속에서 소외되고 잊혀졌던 이름 없는 소시민들의 역사, 그 공동체적 기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작품 속에서 나는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 뿐 아니라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년기를 엿본다. 자식들에게 더 많은 기회, 더 나은 삶을 주고자 희생을 마다 않은 주인공의 어머니는 내 부모님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였던 상호는 짧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느냔 물음을 남겼다고 한다. 어떻게 기억되느냐의 문제는 기억해주는 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상호는 이미 주인공이 그의 삶을 기억하고 기록해주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며,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세찬 시간의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겪어온 세월의 상류에 다다르는 것이다. 백사장 위에서 주변을 둘러본다. 주인공과 상호를 포함한 소년들, 그 파란만장한 유년의 기억이 사금처럼 반짝인다.  

 

 

 

 

[당선작 금상]  

성장의 대가

김세정 

 

 

 

 

성장엔 언제나 대가가 필요한 것일까.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저절로 어른이 되었다는 아이가 없듯이 우리는 매일 매일을 합당하거나 혹은 억울하리만치 넘치는 것들을 지불하며 살아가고, 또 성장하고 그러므로 죽어간다. 그러니 생각해볼 수밖에. 죽음이 없는 곳에선 성장도 불가능한 것일까. 

 

 패거리 중에서 ‘깡’하나는 남부럽지 않은 ‘나’와 상호를 비롯한 고만고만한 녀석들이 한 겨울, 제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으로 담배 피는 시늉을 하더니, 나아가 매우 귀한 것인 냥 양말 속에 은밀하게 숨겨둔 청자담배를 꺼내 물며 어른 흉내를 내는 모습으로 시작된 이 소설이, 그리고 허락되지 않은 것들을 골라서 오히려 도전처럼 행하는 녀석들의 모습이, 사뭇 유쾌했다. 이른 바 ‘삥’을 뜯자는, 역시 비도덕적인 제안이건만 ‘깡’이 있는 사나이들이라면 으레 해볼 만한 일인 냥 너스레를 떠는 상호의 모습에서, 나는 호기로운 반항아 이면에 숨은 짓궂은 소년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다소 발랄하게 시작된 이 소설이 그러나 종국에는 나의 마음을 이렇게나 안타깝게 할 줄 미처 알지 못했다.  

 

누구나 겪어야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겪어봤다는 이유만으로는 아무에게도 함부로 정의 내려 줄 수 없으며 또한 섣부른 조언조차 녹녹치 않은, 짧지 않은 인생의 한 시절. 너무도 유명한 나머지 오히려 빛바랜 수사가 되어 버린 ‘질풍노도’, 그 시기를 담은 이 소설에 대하여 표지에 쓰인 짤막한 설명은 ‘서울내기의 치열한 성장소설’이었다. 매우 짧은 문장이건만 몹시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치열한’이라는 어휘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땡크’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그 별명에 걸맞게 친구들 사이에서 불량기 다분한 ‘상호’에 이어 2인자 역할을 톡톡히 하는 단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땡크’라는 그 별명만으로는 ‘나’에 대한 모든 설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저돌적이고 다부져 보이는 모습 내면엔 섬세한 감성이 존재하고 또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들로서의 그는 아버지의 부재로 자신의 여성성은 제쳐두고 자식들 먹고 입히는 문제로 전전긍긍하는 엄마의 마음을 읽을 줄도 알기에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식이기도 하다.  

 

그의 친구들 역시 풍족치 못한 가정형편을 지녔거나 혹은 다른 이유들로 모두 조금씩의 결핍을 지닌 인물들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는 듯 보이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반항심이 있고 불량해 보이는 상호, 순수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일까 약간 모자란 아이로 오해를 받기도 하는 인구, 부모님이 불법으로 밀주를 담가 생활을 하는 부용이, 가난 때문에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용택이, 배다른 누나가 있는 재홍이, 여자 같은 곱상한 외모와 행동 때문에 친구들과의 사귐이 쉽지 않은 장경이 등, ‘땡크’와 그 주변의 친구들은 무언가 조금씩 채워지지 않은 부분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은 ‘땡크’와 그 친구들만의 공통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훈계하고 교육시키는 ‘악바리 선생님’이나 ‘개다리 선생님’도 마찬가지며 자식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 법을 지키지 못하거나 더러운 꼴 보아가며 일을 해야만 하는 부모님들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모두 다 완벽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서로의 빈 부분을 지적하고 또 때로는 채워주며 투닥투닥 살아가는 게 삶이니까. 

 

 ‘땡크’와 친구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금지된 것들에 호기심을 보이고, 아직은 배우지 않아도 될 세상의 단면들을 보고 또 깨우쳐가며 보낸 1969년의 이야기들이, 나는 마치 우리 삶의 축소판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숱한 에피소드들 중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은 부분은 ‘땡크’가 전해준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누구나 겪는 게 생로병사라지만 이 소설에선 그들 청춘의 발랄함만큼이나 유독 죽음의 이미지, 상실에 대한 그리움 같은 감정들이 자주 읽힌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 혹은 애초부터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할 테지만 결국은 누구나 겪어야하는 성장통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을 전하는 ‘땡크’의 목소리는 비교적 담담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며 결코 치루고 싶지 않은 성장의 대가였다. 강요된 펜팔을 통해 알게 된 전하사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기차에 치여 목이 잘려 죽은 술 취한 노인의 이야기, 비행기의 오착륙으로 인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성이던 가장들이 동시에 세상을 떠난 이야기들 말이다. 그리고 아직 인생의 꽃을 채 피우지 못한 나이의, ‘땡크’의 표현에 의하면 간을 내주어도 아프지 않을 친구 ‘상호’의 죽음에 이르면 안타까움과 슬픔이 복받쳐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정말로, 대가 없이 우리는 성장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누구의 대가가 되어줄 것이란 말인가. 러시안 룰렛처럼 인과관계가 뚜렷치 않은, 도처에 깔린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잃은 것과 남은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언젠가 어느 유명한 소설가의 처녀작에서 자신이 누군가의 핏 값으로 산다는 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말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사실이건, 설령 위선이 섞인 치기어린 감정이건 간에, 분명한 건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사는 게 고단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늘을 산다는 것은 그 만큼의 대가를 치러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삶이 내게 호의적으로 느껴지지 않거나, 때로는 고통과 실망만을 안겨주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할지라도, 오늘을 결코 방만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내일은 오늘을 살아낸 결과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