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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울화통 터지게 하는 소리

7154 2015. 4. 12. 11:54

[고구려 9백 년의 자취소리](조성원 저. 해드림출판사)

***제 책 '고구려 9백년 자취소리' 가 요즘  잘 팔립니다. 고맙기도 합니다. 요즘 일본 아이들 때문 화가 나  그 책에 나오는 한 부분을 올립니다.....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제 글에 그들의 행태가 그대로 나옵니다.*****(조성원)




 
14. 임나일본부설에 대하여  
 


2014년이 다가도록 연일 일본 문제가 시끄럽다. 일본군이 자행한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걸핏하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거론하는 일본이 우경화 움직임과 함께 집단 자위권 문제까지 들고 나왔으니, 그들이 시비를 거는 게 한 두건이 아니다. 뒤로 호박 씨 깐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아예 대놓고 호박씨를 깐다.  
이렇듯 반일감정이 높아진 와중에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명량'의 최다관객 동원 신기록 행진은 일본을 격파한 것에 대한 통쾌함이 필시 한 몫 하였지 싶다. 올 한해 세월호까지 겹쳐져 답답한 현실이 많던 차에 명량이 던지는 화두와 명쾌함은 상쾌와 더불어 통쾌함을 선사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는 단순한 감정해소일 뿐이다. 감정적 해소가 결코 해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일본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절대강자다. 우리보다 인구도 2배 정도 많고 경제력이나 방위비도 그렇고 그간 축적한 소프트웨어가 또한 대단한 나라다. 우리가 요즘 스마트 폰에 한류열풍이 불어 앞서 나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의 우경화는 몇 사람들이 주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원래 나서지 않는다. 아니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쇼군시대, 무사들이 나서는 자들을 그만 놔두지 않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왕좌왕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기운이 무르익었다 하면 때는 이때다 하고는 앞선 측이 마치 눈짓으로라도 한 양 제스처를 보내고 그러면 일제히 무더기로 와! 하며 따라 나선다. 여론도 언론도 군소리가 별로 없다. 불만이 많아도 억울하다고 대성통곡하지 않으며 묵묵히 따른다. 그러면서 얻을 것은 또 차분히 취한다.  
요즘 많은 한국 사람들은 중국과 손잡고 일본에 대응하자고 한다. 반일감정 때문이다. 중국을 잘 몰라서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중국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나라였다. 기본적으로 동맹개념이 희박한 나라다. 지금은 동북아시아에서 미일동맹에 맞서기 위해 한국에게 손을 내밀지만 극단적인 말이지만 유사시에 목숨을 걸고 나 설 경우 전체를 믿을 수 없는 속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 대응하여야 할까. 한국의 미래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순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순신의 감동적인 승리, 나라를 위한 애끓는 충절에 감동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순신이 왜 승리할 수 있었는지를 배워야 한다. 이순신은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적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그에 따른 확실한 전략을 갖춘 뒤 싸웠다. ‘이겨놓고 싸운 것이다. 그것을 잊은 채 12척의 배로 300척의 적을 물리치려 나선 것만을 따르려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 객기일 뿐이다.  
일본은 은밀히 발걸음 죽이며 반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서는 경우가 많다. 늘 그래왔다. 일본의 교과서 기술에서 드러나는 과거사 인식이 단적인 예다. 특히, 고대사와 근현대사와 관련한 한일관계에 대한 서술과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미화와 왜곡 등등...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시행한 것이 아니다. 영토 문제와 관련, 독도와 조어도에 대한 일방적인 주장도 그렇다. 그러한 그들은 그렇게 시작하다 말 존재들이 절대 아니다.  
보다 더 치밀하게 조용히 끈덕지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할 것이다.그들은 진위여부 상관없이 교과서를 통하여 어린 후손들에게도 꾸준히 얻고자 하는 바를 의식화시켜 꼭 취하겠다고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냄비근성으로 앗 뜨거워라 하며 떠들다가 이내 사그라져 먼 산 불구경 하듯 멀뚱멀뚱 해진 틈을 그들은 노릴 것이다. 그런 우리를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행한 과거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여러분들은 '임나일본부설'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무슨 말인지조차 인식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들의 우경화나 제국주의 의식은 단지 근, 현대의 우경화가 아니라 먼 고대국가 시대에도 일관되게 반영하고 있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다 싶지만. 임나일본부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가야라는 지역 즉 임나에 있었다는 일본 고대국가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말한다.  
종래 일본 내의 통설적인 견해로는 임나일본부는 왜가 신라를 위시한 삼한지역의 국가를 평정했다는 369년경 이 지역에 설치되어 562년 대가야가 멸망한 시기까지 존속하였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스에마츠에 의해 보완되고 집대성되었는데([임나흥망사]1949) 그 주요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본서기 신공황후 49(369)에 보면, 아리타와케, 가가와케 등을 보내 백제 장수들과 함께 신라를 치고 이어서 가야지역의 일곱 나라를 평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를 가야 7국의 평정이라 하는데 고대 일본의 임나 지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7세기 중엽에 천황의 권위가 확립된 후 천황가를 미화하기 위하여 편찬된 책으로 일본학계 내에서도 그 신빙성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고 대체로 5세기 이전의 기록은 신화적인 전설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일본부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경에 비로서 나타난다. 또한 기년에도 상당한 조작이 가해져 있다. 예컨대 신공황후가 임나를 정벌했다는 369년은 일본서기에는 24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120년의 오차가 있는데 이와 같은 오차는 시기가 올라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심지어 어떤 인물은 244년간이나 관직에 복무하고 있었을 정도이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편찬된 <고사기>에는 신공황후의 임나정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세 번째 근거로 중국 남북조시대 남송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송서>의 왜왕 작위 기사를 들고 있다. 거기에는 5세기에 남송에 조공을 바치 왜의 5왕이 등장하고, 이 가운데 무왕이 스스로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 7국의 왕을 칭하면서 남송의 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남송의 황제가 그에게 사지절 도독 왜 신라임나가라 진한모한 6국 제군사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는 관작을 수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임나와 가라가 모두 가야를 가리키는 것인데 왜 중복되어 나타나는, 또 이미 예전에 멸망한 진한과 마한이 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무왕이 받은 관작이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허구적인 명예직이었음을 시사한다. 넷째로 이스노카미 신궁의 칠지도를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으로 파악해서 임나일본부설 근거로 삼고 있다.
 
<앞면> 
四年月十六日丙年正陽造百練鋼七支刀 生(?)百兵 宜供供侯王 □□□ 
416일 한낮에 백 번 두드린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나아가 많은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마땅히 후왕들에게 드릴 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 轉示後世 
선세 이래로 아직 이칼이 없었던바, 백제왕세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일지어다.”
 
그러나 칠지도의 앞면 글귀는 국가의 대장인이 정성 들여 작품을 만들고 이 칼이 후왕이 가질만하다고 자부하면서, (공손히) 받들어 올릴 만하다는 겸손의 말을 적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칼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가 직접 나타난 것이 아니고 만든 자가 받을 자격이 있는 대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칠지도 뒷면 글귀의 전시후세의 해석에는 의견차이가 없다.  
이는 흔히 중국 황제가 신하에게 글을 내릴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용어인 것이다.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자기의 분부나 은택의 뜻을 후세에까지 길이 알리라는 내용인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한 만큼 이 칼이 상위자로부터 하위자에게 보내어진 것임을 입증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일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다름 아닌 광개토왕 비문에 적힌 내용을 두고 그들이 말하는 두 번째 항목이다. 
"둘째로 광개토대왕(391-413) 비문이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일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중 왜가 신묘년(391, 광개토왕 1) 이래로 바다를 건너 백잔을 파하고, 신라를 □□하여<?백제□□신라를 정복하고> 그들을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신묘년 기사가 그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新羅以僞臣民"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부터 (우리의) 예속민으로 조공을 하여 왔는데 왜가 신묘년(391, 광개토왕 1) 이래로 바다를 건너 백잔을 파하고, 신라를 □□하여<?백제□□신라를 정복하고> 그들을 신민으로 삼았다.”

말인 즉, 광개토대왕 비의 전체 비문 중에 핵심적인 141자가 세월에 닮아 없어지거나 파손되면서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해 한, , 일 삼국의 역사 논쟁, 그 중심에 서 있다. 1882년 일본군 사쿠오 중위가 비문의 탁본을 정계에 보고한 이후 광개토 대왕릉비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증거 자료로 사용된다.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임나 일본부설은 일본 야마토 정권이 백제, 가야, 신라를 세력권에 두고 4C부터 6C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했다는 이론이다.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로 취급하였던 우리인데 그들은 왜곡된 이론을 꾸준히 제시하며 거의 정설로 인식되도록 나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자구 해석의 문제인데 해당 대상은 이것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OO新羅, 以爲臣民.
 
광개토대왕릉비문상의 위 문장이 당시 일본 학계가 제시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다. '백제와 신라는 예전에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계속 조공을 해왔지만, 왜가 신묘 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OO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 왜가 신묘년 391년에 한반도로 도하해서 7, 4읍을 점령하고 임나(가야)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증명하는 자료라는 것이다. 중간의 두 글자는 훼손이 심하여 판독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 학설은 일본의 조선 강점과 맞물려 한반도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측면에서 일본 정계, 학계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그리고 현재, 다소 잠잠해졌지만 아직도 여전히 엉터리 논리를 꾸준히 주장하는 그들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비문을 갖고 그들은 어찌 역사왜곡을 하였으며 우리의 학자들은 어찌 대응을 하였는지 알아보려 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기 전 먼저 상황 파악을 하여야 하니까. 명량에 이순신처럼 우리도 철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잊지 말고 꼭 그들의 음흉한 계략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늘 템포를 반걸음 죽이며 재면서 끈덕지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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