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더 이상 차별하지 말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 하는…’
수필은 문학의 서자가 아니다. 나는 이 구년묵이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마다 자존심이 상하면서 홍길동전의 위 구절이 연상되곤 한다. 비록 케케묵은 지망(志望)일지라도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할 문제가 다름 아닌 수필과 신춘문예다.
얼추 모든 지방신문사에서는 매년 공모하는 신춘문예에 수필이 포함되어 있으나 신춘문예 자체를 시행하지 않는 한겨레신문을 제외하고는 현재 중앙신문사에서 수필을 신춘문예로 공모하는 곳은 없다. 수필 신춘문예를 시행하면 마치 문학적 권위가 저하된다고 생각하거나 수필의 문학성을 경시하는 처사로 보이는 구석이다. 무릇 문학성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언어로 표현되는 예술이며, 예술의 일반적 개념을 “미적 창조와 미적 표현”이라고 했을 때 수필의 예술성이 부족하다는 인식은 이제 버려야 한다. 문학성의 경중은 여느 장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選)이 필요한 것 아닌가.
지방신문사들이 의식이 박약해서 신춘문예를 공모하는 것은 아니며 당선된 수필은 다른 장르에 버금가는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교과서에서 수필을 다룰 이유가 없거늘 우리는 이미 중학교 때부터 수필을 배워왔다. 문단 역시 수천의 수필가들이 활동하면서 끊임없이 수필집이 발간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문인들을 보면 시인 다음으로 수필가들이 많다. 그리고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도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늘었다. 산문은 모든 분야에서 생활화되어 있으며 이들 중 문학성을 지닌 수필을 골라내기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정부차원의 문예진흥기금 제도에서 수필이라 하여 딱히 차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도 유독 중앙신문사에서만 왜 수필의 신춘문예를 모르쇠로 일관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수필이라는 문학이 인간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나 작금의 질적 성장을 고려하면 수필은 서자취급 받을 처지가 아니다. 신춘문예공모 시기가 되면 수필을 차별하는 중앙신문들의 절독운동이라도 주도하고 싶은 심정이 되곤 한다. 수필가들이 똘똘 뭉치면 못 할 리도 없겠으나 문단의 내부적인 탓도 있어 마뜩찮다. 한국문인협회와 더불어 한국문단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민족문학작가회의조차 수필가들을 회원으로 받으면서도 조직 내 수필분과는 두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민·작 홈페이지를 통해 본 장르분과 조직도는 시분과, 소설분과, 평론분과, 희곡분과, 시나리오분과, 아동문학분과가 전부이다. 그렇다면 왜 수필가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는가. 회비나 받아 적당히 조직재정을 채우며 그저 들러리나 세우자는 의도인지 모르겠다.
남다른 의식을 지녔다는 이 단체의 구태의연한 모습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한국문단을 이끌어 가는 지도층의 정치력 부재가 커 보인다. 이사장이니 분과회장이니 협회장이니 하는 자리를 위해 선거철이면 수필가들의 표를 간걸하거나 당선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면서도 이들이 문학발전을 위해 국가나 중앙언론사를 상대로 어떤 정치적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문단 지도층의 정치력은, 문인들을 향해 떠세하거나 문학 이외의 것들에 눈독을 들이며 세 확장으로 권위를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정신적 양식으로써의 문학을 저변확대 시키고 제각각인 문학과 문단의 가치질서를 통합하는 쪽으로 기울어져야 한다. 장르는 장르대로, 지역은 지역대로, 단체는 단체대로, 출신은 출신대로, 소위 ‘끼리끼리’ 문학이 되다보니 ‘문학’의 공유력은 떨어지고 명실상부한 수필문학이 중앙신문사의 신춘문예에서 아직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는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못 해주는 문단 지도층의 책임이 크다.
기호나 인구면에서 수필은 현실적으로 3대 문학장르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었는데도 수필의 차별은 여타 문학상 공모부문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문재(文才)나 문학의 예술성이 시를 쓰는 데만, 소설을 쓰는 데만 있는 게 아니므로 중앙신문사들의 전향적 사고가 있었으면 한다. 신춘문예제도의 일부 비판론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 당선작품은 누가 뭐라 해도 그 수준이 일반적으로 높다. 이런 제도적 뒷받침이 수필장르의 질적 성장뿐만 아니라 문학 전체의 발전, 더 나아가 국민정서의 풍요를 가져오게 된다. 이를 위해, 특히 수필문단의 지도층은 파벌을 조성하여 역량을 분산하기보다는 수필가들의 힘을 모아 수필의 문학적 위치를 반석 위에 세워야 할 선학자로서의 의무가 있다.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도 수필을 대하는 드레진 자세가 필요하다. 수필은 녹차의 다도(茶道)와 같다. 생잎을 따 아무리 다려도 차의 색(色)·향(香)·미(美)는 음미할 수 없다. 붓 가는 데로 드리없이 써대는 글이 수필이라면 누군들 못 쓰겠는가. 차잎을 채취하여 덖거나 볶고 펄펄 끓는 물을 식혀가면서 관조와 여유로 다려낼 때 두 번 세 번 우려내도 그 색향미가 남아있는 것이다.
경제적 부담이 따른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 중앙언론사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수필을 더 이상 차별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수필드림팀의 테마수필 http://www.sd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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