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숩은 예쁜 낱말

수필 쓰기의 치열성

7154 2007. 10. 3. 05:22
 

수필 쓰기의 치열성

         임병식/수필가



예문)

화가들이 인물화나 영모도를 그릴 때, 맨 나중에 마무리를 짓는 게 눈동자라고 한다. 실로 작품의 성패가 거기에 달려있기에 심혈을 기울려 그린다고 한다. 그래서 예부터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전해오는지 모른다. 우리 집 거실 한쪽 벽면에는 용맹스러운 호랑이 그림 한 점이 걸려있다. 수묵화인데, 부릅뜬 눈동자가 사뭇 위압적이다. 그림의 구도는 놈이 바윗돌을 비켜 앞발을 쓱 내밀고 내려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냥 그림일 뿐이지만 형형한 눈동자가 어찌나 살아있는 듯 보이는지 대하고 있노라면 오싹 소름이 돋는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르려면 많은 각고면려의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상당한 수준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가끔 나의 문학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때가 있다. 나는 지금 어느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지향하는 바는 옳은지 가늠해 보게 된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쓰고자 하는 방향은 대체로 괘도를 이탈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는 아직도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다.

담벼락에 그려놓은 소나무 그림을 보고 새들이 실물인 줄 알고 날아와 앉으려 했다는 솔거의 그림이나, 이 호랑이 그림의 생기 있는 눈동자처럼 사물의 심상을 적확하게 표현하여야 할 텐데, 아직은 그런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이러한 형편이다 보니 나는 글을 쓰면서 내 글이 과연 독자들에게 다가가 얼마나 공감을 일으키고 있을까, 늘 긴장하며 의식하게 된다.


화두로 삼고 있는 고향정서의 애틋함이나, 그 밖의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는지, 문장은 공감을 받는 건지 노심초사하게 된다. 이 버릇은 이병기님의 '말 모르는 작가들'이란 작품을 읽으면서 더욱 신경을 쓰게 되는 부분이다.


선생님은 이 글에서 동서고금의 위대한 작가들- 즉, 두보, 한유, 톨스토이, 테니슨을 예로 들어 이분들이 작품을 쓸 때 수없이 퇴고(推敲)를 거듭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할 게 아니냐고 따끔하게 충고를 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바로 나에게 내리는 질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읽은 김동인님의 '광화사(狂畵師)'란 작품을 떠올리며 작품 창작의 치열도도 그 정도는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광화사의 주인공 화가 솔거는 어느 날 미녀상을 그리기로 하고 아랫도리부터 먼저 그리게 된다. 그런 후 나머지 부분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방황한다. 그러던 중에 시냇가에서 한 소경처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 얼굴 표정이 자기가 찾고자 한 모습임을 알게 되어 그 소녀의 얼굴을 그리기로 마음먹고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리려는 중요한 부분이 상대가 소경인 관계로 그려 넣지를 못하고 갈등을 하던 차에, 애욕이 발동하여 마침내 소경처녀를 죽이는 상황까지 이른다. 한데, 그가 안고 있던 시신을 방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벼루가 전복되면서 먹물이 화선지로 튀고 그게 눈동자의 그림이 되어 그림은 마침내 완성이 된다. 하지만 그 그림은 불행하게도 당초 자기가 그리고자 한 선한 미인이 아닌 원망의 빛이 가득한 그림이 되어버리고, 화가는 끝내 광인이 되어 떠돌다가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예술지상의 고뇌에 찬 몸부림이 그대로 느껴져서 번쩍 정신이 들게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가람선생님도 안이한 태도를 따끔하게 꾸중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동천에 뜨는 초사흘 달, 높직한 부엌 문설주에 걸터앉으며, 벌건 앵도 밭에 기러기 내린다.'등의 표현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어디 동촌에 초승달이 뜨며, 문지방이라면 몰라도 문설주에 어찌 걸터앉을 수 있으며, 오뉴월에 무슨 뚱딴지같은 기러기냐고 무성의 한 글쓰기를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서 전에 염상섭님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란 작품에 '해부를 하니 김이 모락모락 났다.'라는 표현을 두고, 냉혈동물인 개구리가 어찌 '김이 나느냐.'고 하던 비평과 같은 따끔한 지적이다. 콩깍지 낀 나의 눈에도 그동안 읽은 작품 중에 더러 눈에 설은 글들이 보였다. 예들 들면, 소나무는 본래 소성이 곧아 변형이 되지 않는데도 소나무가 전에 볼 적에는 굽어 있었는데 몇 년 뒤에 보니 곧추서 자라고 있더라는 표현이나, 푸줏간을 지나면서 목이 잘린 채 내걸려진 쇠머리를 보며 어린 시절 소 먹이던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을 보고 정서 장애인이 아니고서 어찌 이런 표현을 쓸까 실망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글들은 아무리 구성이나 내용이 좋아도 공감을 안겨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지적은 했지만 글 깨나 쓴다는 사람이 이 정도니 둔재에다 감각까지 무딘 나 같은 사람이야 몰라서 그러하지 오죽 오류가 많았겠는가.


그래서 최근에는 작품을 쓰면서 작품이 내 생각과 느낌을 제대로 담았는지, 표현에는 무리가 없는지 퇴고를 거듭하고 있다. 이런 데에는 남의 오류를 보고 느낀 반면교사적 교훈도 있지만, 기실은 진땀을 흘리지 않고 써내는 글이 어찌 남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랴 하는 반성 때문이다. 그래서 근자에는 안두(案頭)에 앉아 있는 시간이 나도 몰래 진중해 지고 길어지고 있다.(필자 졸작)



출처: 막 쓰는 수필, 잘 쓰는 수필(저자 임병식/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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