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숩은 예쁜 낱말

수필에 있어서 상상의 응용

7154 2007. 10. 9. 07:57
 

수필에 있어서 상상의 응용

            임병식/수필가



수필 쓰기에 있어서 상상은 어디까지 허용되며 한계는 어디인가. 그리고 꼭 허구를 허용해야하는가. 후자를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라고 본다. 상상을 어떤 대상 혹은, 현상을 보고도 가능하며 특히 꿈속에서 보고 겪은 일은 제약을 받을 성질도 아닌 것이다. '왜 그렇까?' '그렇지는 않을까.'하는 상념 속에서 상상은 얼마든지 꽃피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예화 작품을 통하여 상상의 문제를 짚어보기로 하자.


<예화>

돌 꿈 이야기


간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몽중(夢中)에 겪은 일이 마치 생시인 듯 선연하기만 하다. 그야말로 화상(化像) 속의 선계를 거닌 느낌인데, 도무지 꿈같지가 않다. 그것은 내가 좋아한 수석(壽石)들을 만난 때문일까. 옛 분들과 나눈 대화가 아직도 망막에 어리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간밤에 나는 뜻밖에도 별유천지의 무릉도원을 거닐었다. 이 세상에는 없는, 아니 존재할 수도 없는 그런 세계, 어디엔 가는 분명히 있을 법한 가상 속의 석실을 구경하며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만났던 분들은 현실이었다면 언감생심, 그림자도 밟지 못할 조선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7)선생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선생, 그리고 옥수(玉垂) 조면호(趙冕鎬 1803-1888)선생 같은 분들이었다.

세분 어른들은 수석을 배우려 찾아간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대 애석가답게 신위선생은 내게 조그마한 촌석(寸石) 한 점을 곡산산(谷山産)라며 기념석으로 건네주셨고 ,추사선생은 붓끝에 먹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로 쓴 작품을 주셨으며, 옥수선생은 당대 대시인답게 즉석에서 수석시(詩) 한편을 지어 주셨다. 모두가 소중한 것이었지만 꿈속에서도 추사선생의 글씨는 특히 귀하고 귀하게 여겨져 몸통까지 차 오른 시냇물을 건너면서는 어떻게든 물에 젖지 않으려고 손에 쥔 글씨를 머리위로 추켜올리고는 조심스레 건넸다. 물론, 현실세계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나이에도 곧잘 꿈을 꾼다. 꾸는 꿈이란 대부분이 수석과 관계된 것인데, 수석을 찾아 탐석(探石)에 나서거나 구경하는 꿈들이다. 그런 꿈을 꾸면서 좋은 돌을 만나 집으로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돌이 너무 커서 엄두를 못 내고 쩔쩔매다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오는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꿈들을 깨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턱없이 엉뚱한 게 아니고, 어디서 만나 볼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데, 어젯밤에 꾼 꿈은, 시공을 초월하여 무려 18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었으니 가당치도 않는 환상이었다. 그러나 어찌 생생한 감동을 말로 다 할까. 너무나도 현실만 같아서 흥분으로 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분들의 면면이 그토록 흠모해 마지않은  어른들이었으니……. 나는 평소 조선후기 정.순조대에 꽃피운 문예중흥의 시기를 동경해 마지않는다. 우리의 정신문화는 그때 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의 문화를 오늘날에 반에 반만이라도 계승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것이다. 시(詩)서화(書畵)는 물론이이요, 우리가 생소하게 생각하는 수석문화도 그때 중흥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당대를 살았던 옥수선생의 시 한편을 읽어본다.

拳大靑鋼石 重於錦繡山

情情復夢夢 積積噓雲間

(청강석 크기는 주먹만 한데 무겁기는 금수산 보다 더 무겁네.

볼수록 석정은 깊어만 가 몽롱하게 취하고 깊은 산골엔 구름만 쌓이네)

이 얼마나 멋들어진 정취인가. 그뿐인가. 하루는 자하 선생께서 사라천(沙羅川)에 갔다가 수레에 무엇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그의 부인은 혹시나 무슨 귀한 보화라도 거져 온 줄 알고 웃으며 버선발로 마중 나왔다가 보고는 실망하고 돌아선 대목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파안대소를 하게 한다. 이를 추사선생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九日 沙羅川 及其 歸去來

惟石 戟之前 家人 不知石

迎門 喜色溢 謂是 千黃金 謂知 一頑物 …….

...(9일간 사라천에 갔다가 그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올 제 앞세워 실어온 것은 돌뿐이었다네. 식구들은 돌인 줄 모르고 마중 나와 기쁨 넘쳤다가 이것이 천냥금이요 하며 알고 보니 한갓 완상물이군요…….)

추사선생도 그 모습이 재미나서 시로 남겼을 것이다. 나도 한때 마음에 든 수석을 구입하고서 전에 궁색한 형편임에도 김용준 선생이 덜컥 두꺼비 연적을 살 때처럼, 아니 자하 선생이 부인의 구박을 받는 때처럼 일을 저질은 적이 있다. 낙월도산 음석(陰石)을 덜렁 고가에 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의 일이다.

지금은 수석 산지가 고갈되어 쓸 만 한 돌 한 점을 구하기 어려우니 추억에 젖을 수밖에. 그리고 추사선생이 읊은 시구, 頭頭 漏又玲瓏 一片安能在其中 (덩어리마다 구멍 뚫려 영롱한데 그중에서 딱 한 점 탐석하련다 )―처럼 별유천지의 그 시절을 그저 부러워 할 수밖에.(필자 졸작)


<해설>

이 작품은 꿈속에서 만나본 애석인을 그리며 쓴 작품이다. 이렇듯 상상은  꿈을 빌려와 마음껏 유유자적 해볼 수도 있으며, 어떤 사물을 두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글을 쓸 때는 이것이 상상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어느 대목에 밝혀놓아야 할 것이다. 너무 체험한 사실에만 얽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유로운 상상을 억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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