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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지 못하는 보람줄

7154 2007. 10. 26. 10:13

옮기지 못하는 보람줄

       전 영 관



 

용암이 흐르듯 강렬했다. 목울대를 넘어가는 뜨거운 액체와 아뜩함, 그리고 그 아이의 비명 소리를 끝으로 화면은 정지되었다. 다시 기억의 회로에 전원이 들어온 것은 병원 응급실. 목으로 커다란 호스가 끼워져 있었고 마치 도축장에 끌려온 기분이었다. 호스를 통해 물이 들어가고 뱃속을 휘저은 후 다시 입을 통해 쏟아졌다. 둘러선 의사와 간호사가 도축장 인부들로 보였었다.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 순간은 단순히 낯설다는 느낌뿐이었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은 한참 뒤에야 제자리를 찾았다. 죽지 못했던 것이다.

스물 한 살의 기억이다. 열쭝이였었고 난생 처음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으니 그 아이와 결혼해야 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첫사랑 감정의 기복이 얼마나 심했을까. 새물내 나는 데이트도 했었고 물매 급한 내리막에 팽개쳐지기도 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세상은 분홍장미였고 어떤 아픔도 함께라면 두렵지 않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불행은 번개처럼 날아와 소나기처럼 퍼붓고 떠나갔다. 그 아이와 이별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일기장에는 슬픔이니 절망이니 하는 따위의 표현조차 없었다. 막막하다는 말 외에는 어떤 표현도 소용되지 않았었다. 그믐밤 온 세상이 동시에 정전된다면 그 기분과 같을까? 가리새 없이 그 아이 앞에서 극약을 들이켜고 말았다.

누나들과 부모님이 오셨다. 왈칵 눈물이 솟았지만 닦을 수 없었다. 1남 4녀의 외아들로 키우면서 지청구 한 번 하지 않았고 마냥 도두보이던 아들이 그런 몰골로 누워있으니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이러느냐며 어머니는 흐느끼셨다. 누나들 역시 아무리 철이 없어도 이만큼이나 한심할 줄 몰랐다며 울기만 했다. 차라리 미친 녀석이라고 뺨이라도 때렸으면 싶었다. 분노를 안추르며 창밖만 바라보시던 아버지 뒷모습이 납덩이보다 더 무거운 그늘로 병상에 얹혀있었다. 이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부끄러움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온 몸의 통점마다 바늘이 꽂히는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내리 딸 셋을 낳고 나를 얻으셨단다. 어머니의 떡을 잡숫지 않은 칠갑산 돌부처는 없다고 할 정도로 치성 드려 얻은 아들이었단다. 그나마 행여 딸일까 싶어 조선간장 한 사발 들이켰던 적도 있었단다. 높은 방죽에 올라가 뛰어내리려 했지만 차마 그리하시지 못했다고도 한다. 그 때문일까? 고모들은 얼굴 검다고 놀리곤 했다. 󰡐���네 어머니가 간장 마셔서 그리 검다고.󰡑��� 그렇기야 하겠냐만 어린 시절에는 그런 놀림이 싫었다. 간장까지 들이켜며 떼어버리려 했던 아들이 또다시 간장보다 더 치명적인 상처를 어머니께 남긴 셈이다. 아버지의 뒷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식도와 위장에 약간의 화상을 입었을 뿐 아무 후유증 없을 거라고 했다. 우연히 대학병원 앞 다방에서 만난 까닭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받으셨을 상처와 아버지의 충격은 어찌할까. 화인(火印)처럼 남겨진 흔적은 오래도록 부모님을 건밤 새우시게 했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부끄러움과 실연의 허망함에 빠져 볼가심만으로 한 달 가량을 누워있었다. 지쳐 쓰러지듯 누워있던 어느 날 머리맡에서 어머니와 누나가 나누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듣게 되었다. 사람을 잊는 약은 사람 밖에 없으니 얼른 여자 친구 소개시켜 주라는 말씀이었다. 가슴이 출렁했지만 뒤척이는 척 돌아누웠다. 부모란 저런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녹일 듯 흘러내렸다. 한 달 전의 그 약보다 더 뜨거운 느낌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어디 내놔도 도두보인다는 아들이 이런 죄를 지었으니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부모의 연치를 경험한 자식은 없다. 그러나 모든 부모는 자식의 나이를 지나온 사람들이다. 이는 누가 더 이해의 폭이 넓은지 설명조차 필요 없다는 뜻이 된다. 자식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했다면 그 반추의 고샅에는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아이들 키우며 점점 부모님을 되돌아보는 까닭이다. 평생 아들 장맞이하고 계셨을 부모님을 이제야 만나는 까닭이다. 애옥살이와 아들 못 낳는 설움에 멍울진 어머니 모습이 지금서 환히 보인다는 말이다. 스무 살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간장 때문일까? 아니면 다 큰 아들의 돌출행동에 충격 받으신 때문일까? 어머니는 지금껏 위장장애로 고생하신다. 병원서는 단순히 기능이 떨어지는 것 말고는 아무 병증이 없다지만 정작 당신은 평생 고생하셨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아들을 낳으셨으니 다행이라고 어머니 앞에 우쭐하곤 했지만 그거야 어린 시절 이야기다. 문득문득 어머니 마음의 조선간장 한 사발은 아들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에 짠해지는 거다. 높은 방죽 때문이 아니라 아들 때문에 무릎 저리신 것은 아닌지 그 높이가 섬뜩하다는 말이다. 치기(稚氣) 가득했던 아들 때문에 어머니는 위장장애를 평생 안고 사시는 건 아닌가 싶다. 세월이 흘렀어도 죄책감은 오히려 또렷하게 돋을새김 되고 있다.

자식과 부모라는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거다. 시커멓게 수염 난 장남을 보며, 사춘기 시작하는 둘째를 보며 웅숭깊은 부모 마음을 알아가고 있다. 머리도 좋고 성적도 뛰어난 첫째는 고등학교 가서는 도무지 공부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아내는 우울증 증상까지 생겼고 나 역시 아이에게 섭섭한 마음이 가득하다. 둘째는 열심히 하지만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제 딴에 고민하는 모양이라 말도 못하고 지켜보자니 참숯 한가마 삼킨 기분이다. 내 아들들이 아비처럼 엉뚱한 일을 벌일까 덜컥 걱정도 된다. 행여 가출이라도 하면 어쩌나 혼을 내다가 여짓거리곤 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법이겠지.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며 부모님이 겪으셨을 아픔이 새롭다. 내 아들들이 혹시라도 목숨을 내놓는 일은 없을까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 녀석들은 내게 얼마나 많은 간장사발을 들이밀까 사뭇 걱정도 된다. 철없던 아비의 어떤 모습을 닮았을까 가늠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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