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문득문득

누나

7154 2008. 6. 1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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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1.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이웃마을 당산을 사람들은 등마당이라 불렀다. 이 등마당을 넘어와 우리 동네 들머리로 이어진 둑길을 따라 갯바닥으로 나간 이웃마을 여자들은, 여름 한나절 쏙이나 맛 또는 게를 잡거나 *썹서구를 채취하여 해거름이면 다시 둑길을 따라 줄을 지어 돌아왔다. 거기에는 열일곱 살 난 누나가 있었다.

누나가 바닷가에서 돌아올 즈음 나는 둑으로 나가 서성대며,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개펄에서 휘적휘적할 누나를 밀물이 뭍으로 얼른 밀어내주기를 바랐다. 마당에서 멀리 펼쳐진 갯바닥을 바라보면 밀물이 들어오는 기세가 서서히 꿈틀대던 때였다.

개펄을 뒤집어써 온몸이 시커멓던 누나는 집 앞 둑에서 얼쩡대는 나에게 맛이나 쏙 몇 마리씩을 단지에서 꺼내주었다.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옷으로 주둥이를 틀어막은 단지 안에서는 쏙과 게가 뒤엉켜 비릿한 바다냄새를 풍기며 연방 바스락거렸다. 개펄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누나는 그 가운데 제법 튼실한 놈으로만 골라주었다. 갯것을 건네며 함박만 하게 짓던 누나의 미소는 개펄 묻은 시커먼 얼굴에서 더욱 하얗게 빛이 났다. 코 밑을 스치던 누나의 짠 냄새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쏙과 맛을 아궁이의 불로 구어 먹으며 또 다음 날을 헤아렸다.

내가 여덟 살 때쯤이었을까. 이웃집에서 살다가 갑자기 이웃마을로 이사를 해버린 누나가 거미가 내릴 무렵이면 허기지도록 보고 싶었다. 어떤 날은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으며 갯바닥으로 나간 누나를 기다렸다. 슬픈 표정을 지으면 누나가 더 오래 머무르며 옆집에서 살 때처럼 살갑게 다독여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심한 누나는 내가 어머니에게 야단이라도 맞은 양 엉덩이를 한두 번 토닥일 뿐 쏙과 맛을 꺼내주고는 총총히 일행을 쫓아갔다. 바삐 가야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아는지라 누나의 뒤태는 늘 짠해 보였다. 

누나는 의붓어머니와 살았다. 누나의 친어머니는 무슨 연유인지 누나가 어렸을 때 집을 나가 타지에서 산다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한 배인 바로 아래 남동생을 제외하고도 누나에게는 배 다른 남동생이 줄줄이 다섯이나 되었다. 학교를 다니는 대신 누나는 집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후줄근한 차림의 할머니까지 수발을 들었다. 바로 아래 남동생도 이른 아침 꼴을 한 망태씩 해놓고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다른 형제는 이미 학교로 향한 뒤였다. 말 수가 적은 누나도 그 형도 얼굴에는 허연 버짐이 피어 있었다. 밤이면 가끔 우리 집으로 쫓겨 온 누나를 어머니는 부엌에서 치마폭으로 감싼 채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 누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를 챈 나는 누나가 내 친 누나가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았으면 싶었다. 그리고 누나에게 무엇이든 잘해주어 행복해 하는 누나를 상상하다가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예쁘게 보이던 누나도 몹시 미울 때가 있었다. 누나 집에서 그 집 형제들과 숨바꼭질을 하는데 내가 술래였다. 숨은 사람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릴 즈음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던 누나가 느닷없이 막내 동생을 업고 튀어나와 마루기둥의 진을 짚었다. 누나에게 잔뜩 토라진 나는 다시 술래가 되어 아이들을 찾는 척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누나를 못살게 구는 이복형제 편을 들어준 누나가 미웠던 것이다.


어느 해 가출을 한 누나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누나는 틀림없이 행복하리라 믿었다.


*재첩보다 작은 어패류로 주로 개펄에서 서식함



2.


해남 어딘가에서 살았다는 누나는 어느 날 아들 하나를 데리고 우리 이웃인 친청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때 누나를 처음 보았다. 시골 사람 답지 않게 누나는 하얀 피부와 단아한 용모를 지녔으나 늘 죄 지은 사람처럼 다소곳하거나 어딘가 허전한 표정이었다. 누나가 데리고 온 대여섯 살 사내아이는 어찌나 온순한지 볼수록 정이 느껴져 녀석이 떠나고 난 후 한동안 가슴이 아렸다.

마을 들머리인 당산 모퉁이에는 우리 집과 또 한 채의 집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이웃집은 이사가 잦았다. 우리는 그 집에서 네 번의 새로운 이웃을 맞이하며 살았다. 이웃집에도 대문이 있었지만 그들은 주로 우리 집 뒤안길로 넘어와 우리 사립문을 통해 동네로 들어가곤 하였다. 동네 어른들이 사립문 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누나는 한 손으로 긴 치마를 살며시 접은 다음 목례를 하며 어른들 등 뒤로 비켜 지나갔다. 어쩔 수 없이 어른들 앞으로 지나쳐야할 때면 누나는 들릴 듯 말듯 “잠시 지나가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한 후 여전히 치마를 접은 채 사뿐사뿐 지나갔다. 누나의 아버지가 앉아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 앞에서 행여 치마라도 펄럭일까봐 지극히 조심스러워 하던 누나의 자태는 귀부인처럼 고와 보였다.

왜 친정에서 지내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던 누나는 얼마 후 내가 다니던 중학교 입구로 아이와 함께 이사를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빠져나오던 어느 날 학교 정문에서 서성대는 누나를 보았다. 까만 교복차림의 고만고만한 1학년 아이들 틈새에서 용케도 금방 나를 발견한 누나는 내 소매를 붙들고 집으로 데려갔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간 나에게 누나는 따뜻한 수제비 한 그릇을 내놓았다. 그토록 지겹던 수제비가 누나 앞에서는 게 눈 감추듯 비워졌다. 누나의 아들은 수제비를 먹는 나를 웃을 듯 말 듯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내가 누나 집을 나설 때면 얼굴을 실룩대며 울먹거렸다.   

재혼을 하여 충청도 어딘가로 떠나기 전까지 누나는 종종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어떤 날은 국수를 또 어떤 날은 수제비를 차려주며 수업이 끝날 무렵의 허기를 가시게 해주었다. 그리고 어느 틈에 발견하였는지 헐렁해진 교복 단추를 홀쳐주거나 터진 호주머니를 기워주기도 했다. 당시 누나에게 느껴지던 정은 눈물이 나도록 포근한 것이었다. 누나가 떠나기 전날도 나는 누나 집에서 수제비를 먹었다. 하지만 그날은 멀건 맹물에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내 휘휘 저어 만든 수제비 맛이었다. 이사를 한다는데도 ‘누나, 그동안 고마웠어요. 편지 쓸게요.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말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하다가 사라질 뿐 내성적인 나는 끝내 아무런 말을 뱉어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내 마음은 내내 교문 밖으로 줄달음쳤다. 수업을 마친 후 학교를 빠져나오던 그날따라 교문 밖에는 을씨년스럽게 바람이 불어댔다. 의지할 데가 사라진 것처럼 허전허전 아쉬운 마음이 쓰리도록 소용돌이쳤다. 아무리 누나가 살던 집을 외면하려해도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누나가 베풀어 준 정을 삭히느라 나는 입맛을 잃을 지경이었다.  

누나의 재혼은 어머니가 우연히 중매를 하여 이루어졌다. 몇 해 전인가, 어머니가 그 누나를 만나 수제비 이야기를 꺼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더라는 말을 들은 나는 짝사랑을 하다 들켜버린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지면서 소중하게 간직해온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허탈한 심정이었다.

내 나이 지천명이 된 지금이야 얼굴마저 희미하지만 어린 시절 내게 심어진 두 누나의 속정은 단풍잎처럼 시시로 곱고 선연하게 색깔이 입혀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