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문득문득

이제 인문학이 ‘촛불세대’에 희망 줄때

7154 2008. 6. 15. 10:40

이제 인문학이 ‘촛불세대’에 희망 줄때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인문학은 원전 텍스트와 마주하는 학문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마주하기만 할 것인가? 인류가 생산한 지적 유산에 대한 역동적인 해석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원전 읽기로 다진 실력으로 당대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담론을 담은 저술을 펴낼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전 <교수신문>이 강단 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인문서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대부분의 답변에서 번역서 시리즈 일색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출판은 번역서 과잉인가? 아니다. 마땅히 번역 출간되어야 할 목록은 넘치지만 실제로 출간되는 책은 얼마 되지 않아 오히려 번역 경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번역서의 역동적인 해석 작업 또한 아직 가뭄에 콩 나는 꼴로 진행될 뿐이고 창조적인 저술은 더더구나 찾아보기 어려우니 번역서 과잉으로 비칠 따름이다.


우리는 1980년대에 빛나는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때 출간된 책들 중에는 원전뿐 아니라 우리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한 책들이 적지 않았다. 또한 여러 인문서들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바꿀 정도로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문출판은 지난 시절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한층 폭과 깊이를 넓혀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또한 ‘아니다’이다. 최근에 서울이라는 공간을 인문학적으로 탐구한 <서울은 깊다>(전우용, 돌베개)는 대중서로도 손색이 없으면서도 10년의 내공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이 책은 나(또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지금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를 천착하라는 가르침을 제대로 안겨주면서 ‘뉴타운’으로 표상되는 욕망덩어리의 서울을 뛰어넘어 삶의 공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수준 높은 인문학적 보고서다.


70~80년대 비판적 인문출판의 세례를 받은 사람 중에서 자기가 선택한 주제에 대해 오랫동안 꾸준히 연구해 얻은 남다른 안목을 책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어설픈 기획출판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경우가 날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에게 직접 영향을 받은 그들의 자식 세대가 최근의 촛불집회를 선도했을 것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제 그들의 넉넉한 안목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뜨게 된다. 하지만 인문학을 살리겠다고 시작된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지원 프로젝트가 작동한 뒤 오히려 책으로 출간할 만한 결과물의 기근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든 학자들이 학진의 프로젝트라는 우산에 숨어들어 안주하는 바람에 현실을 직시한 담론 생산에 다소 소홀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기획력 부재의 출판기획자들도 이 책임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탈근대의 시각을 가진 나이 어린 ‘촛불세대’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이 나라의 미래와 직결된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386세대가 6월 항쟁에서 느낀 성취감을 이들도 경험하도록 배려해주어야 한다. 또한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한층 깊고 넉넉한 혜안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인문서를 안겨주어야 할 책무가 한층 커졌다 하겠다. 이런 일에 강단의 학자들까지 발 벗고 나서준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훨씬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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