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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가네

7154 2009. 3. 1. 03:40

오네가네


노란 은행잎이 분분하던 날, 어려울 때마다 나를 드림줄 대하듯 하는 친구가 사무실로 찾아와 통장을 하나 더 만들어 달라 한다. 지나친 욕심으로 몇 년 전 자그마한 사업장을 들판내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친구다. 이미 통장이나 핸드폰 등 내 명의를 빌려 쓰며 이러 저러한 일로 어지간히 속을 썩여온 얄미운 위인인데 어떤 부탁을 해오면 쉬 거절 못하고 데림추처럼 나서고 만다.
점심때를 이용해 은행으로 갔다. 창구에서 건네준 용지에 필요사항을 기재하다가 비밀번호를 뭐로 할까 망설였다. 친구에게 “지금 돈이 얼마나 있으면 좋겠느냐.” 했더니 여전히 자지러지는 그 욕심은 대뜸 50억이라 한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가엾기도 하다.
예전에 통장을 만들면서 억(億)을 생각하다가 숫자를 조합하여 억을 표현하면 어떤 숫자가 필요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이리저리 짜 맞추기를 하여도 쉽지 않아 59를 억으로 발음하기로 했다. 오를 어로 보고 구의 기역을 따온 것이다. 내가 만들어 준 친구의 통장에 50억이 들어오라는 의미로 비밀번호를 505954로 적었다. 50억(59) 오(5)네(4)…. 그러나 종종 확인을 해보는 그의 통장은 노 깡통이다.

전화번호를 쉽게 기억하고자 이미 오래전부터 아라비아 숫자를 우리말로 발음해 온 경우가 허다하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사이사(2424), 칙칙폭폭(7788-서울역), 빨리빨리(8282), 오빠오빠(5858) 등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던가, 중학교 때던가. 선생님이 한라산 높이 1950미터를 ‘한번(1) 구경(9) 오십(50)시오.’라고 가르쳐 주어 지금도 비문처럼 머리에 새겨 있다. 나는 특히 숫자에 약하다. 숫자로 따지면 석두(石頭, 일명 돌대가리)보다는 수두(水頭, 일명 물대가리)와 친하다. 새기기가 어려워 그렇지 석두는 한번 새겨두면 오래가는데 수두는 넣었다 하면 흘러버린다. 그래서 예전에 한국사 연대를 암기하느라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사건의 연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한국사 시험문제를 수월하게 풀어낼 때가 있다. 예컨대, 무신의 난은 고려사 전체에서 전․후기의 연결고리에 해당한다. 다른 의견이 없지는 않으나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고려사 중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문신들에게 권좌에서 철저히 배척된 무신들, 문신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사건에서 발단이 된 무신의 난은 몇 년도에 일어났을까. 정중부의 치욕을 보고 이의방과 이고 등은 정중부에게 말한다.
“문신들 한 놈 한 놈 칩시다.”
이때가 1170년이다. 1170을 한글화하면 ‘한 놈(1) 한 놈(1) 칩시(70)다.’가 된다. 무신의 난 연대를 알고 나면 덤으로 암기 되는 연대가 있다. 70에 절반이면 35인데 1135년은 서경천도를 주장한 묘청의 난이 일어난 해이며, 1170년의 꼭 100년 후인 1270년은 배중손 등이 항몽을 위해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다. 삼별초 군인들은 “몽고 장수들 한두 놈 칩시다.”라고 외치며 전의를 불태웠을 것이다.
고려(9)일(1)파(8)가 918년 고려를 세운 후 그 고려는 언제 멸망했을까. 고려는1392년 고려멸망일(1)세(3)아(9)듀(2)했다. 아듀(adieu)는 안녕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후삼국 가운데 신라 멸망 아(9)세(3)오(5), 후백제 멸망 아(9)세(3)유(6)라나 어쩐다나…. 조선사에서도 ‘광숙이는 17세’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광해군부터 숙종 때까지가 17세기라는 의미이다. 이를 기준으로 경종, 영조, 정조가 18세기요, 임진왜란이 일어난 광해군 바로 위 선조부터는 16세기이므로 ‘광숙이는 17세’로 틀을 잡으면 조선사 연대 흐름을 이해하기 쉽다.

비밀번호가 그리 비밀스럽지 않은 사이버 문학 사이트에서 나는 주로 오네가네(5494) 한다. 오네가네 하다가 싫증이 나거나 지치면 반대로 가네오네(9454) 한다. 어느 문학 사이트에서 내 아이디는 W12836이다. 이는 또 무슨 조합일까. W는 write의 첫머리이며 숫자는 많(1)이(2) 푸(8)세(3)유(6)다. ‘글을 부지런히 퍼내자.’라는 염원을 담았다. 자칫 ‘글 써서(w) 많(1)이(2)파(8)세(3)요(6).’라고 읽을 수 있으나, 매문매필(賣文賣筆)할 일 없으니 후자의 해석은 주물(主物)에 딸린 종물(從物) 정도로 생각한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 친구의 깡통계좌처럼 W12836의 아이디를 쓰는 내 문학 사이트 또한 두옥(斗屋)이요, 글쟁이로서 남세스럽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힘차게 짜내 보자. 요즘처럼 세상이 어려운 때 해드림출판사의 새로운 아이디를 만든다면 dream88154 또는 book7154로 하고 싶다.
8 8 1 5 4 ?,  7 1 5 4 ?
무슨 뜻인지는 독자의 해석에 맡긴다.

 


*‘노 깡통이다.’이다 할 때 ‘노’는 ‘노상’과 같은 말입니다.(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