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단단히 세뇌당하고 싶은 저자의 신념
-이승훈 ․ 수필가
1. 꽃등
다시 한 번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기회를 얻었다. 아니 강조하기보다 나 자신이 저자의 그 힘에 단단히 세뇌당해 ‘긍정과 꿈과 희망과 용기와 준비’의 전도사를 자처한다. 따라서 이 글은 작품해설이 아니라 저자의 작품에 호소력을 보태기로 끼어든 서평 내지는 강평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싶다. 저자의 연륜을 생각해서라도 저자의 봉조(鳳藻)를 해설한다는 미명은 예의상 지천명의 나에게 가당치 않다. 그래서 순수한 독자로서 쓴다.
「황혼의 그레이스 라이프」는 지난해 출간한 「황혼의 찬가」를 좀 더 다듬고 보완한 삶의 지혜서이다. 특히 노년, 호주, 이민 등을 테마로 ‘긍정과 꿈과 희망과 용기와 준비’라는 메시지를 저자의 강한 신념을 비추어 전한다. 다만 이는 특별한 삶이 아닌 보통의 우리에게 전하는 지혜이다.
2. 긍정과 희망의 모멘트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어쩐지 나에게는 낯설었다.
읽지는 못했지만 워낙 인구에 회자하던 책이라,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긍정의 힘’이 풍기는 뉘앙스를 마음 편한 사람들의 한담(閑談) 정도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깊은 슬픔 같은 극복하기 어려운 마음이 깃든 사람에게 그 긍정의 힘은 아무래도 호소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음습한 그림자가 오랫동안 나를 에우친 탓인지도 모르겠다.
12년여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담담하기도 하련만 연이어 두 형제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우울한 터널을 나는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에는 10여 년 동안 한 우물을 파고도 꿈을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패배의식이나 그 이루지 못한 꿈의 여진이 항상 빙의처럼 달라붙어 애옥살이와 잠재적 의욕을 짓누른 까닭도 있다. 떠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인제 그만 스스로 어둠을 거두어야 하며, 앞으로 살아낼 세상 앞에서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거늘, 아무리 긍정의 힘이 고유명사처럼 다가와도 그 긍정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던 내가 다행히 이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1년여 전 서범석 작가의 「황혼의 찬가」 원고를 정리하면서부터다.
내 수필의 9할은 비감으로 가득하다. 평범한 일상 아래서도 붓을 들기만 하면 원고의 글자들은 이내 꿉꿉하였다. 운영이 어려운 출판사 현실을 고민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다 보니 근래까지도 희망이라는 그 상투적인 단어조차 좀처럼 가까이 못 하던 내게 서서히 변화의 전조가 안으로부터 꿈틀댄 것이다. 펴내는 글에서도 저자가 밝혔듯이 이번 「황혼의 그레이스 라이프」는 이전 「황혼의 찬가」증보판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긍정과 꿈과 희망과 용기와 준비’를 대하는 저자의 독신(篤信)이 가득한 에세이집이다. 원고를 들여다볼수록 저자의 긍정적 믿음은 바로 나에게 던지는 듯한 메시지처럼 생생히 다가왔다.
고백하건대, 처음 「황혼의 찬가」 원고를 받았을 당시만 해도 고희 중반에서 앞날을 향해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가 얼마큼 진정성이 있을까 하였다. 이는 내 안의 누적된 소극성이 오랫동안 기승을 부린 탓이다. 하지만 저자의 연륜은 지천명인 나에게 결코 아득한 삶이 아니라는 사실과 작금의 처지가 다소 어두울지라도 숱한 기회가 주어진 내 삶의 가치를 저자의 원고를 정독하며 새롭게 인지할 수 있었다. 또한 저자가 미리 준비해준 긍정의 독신(篤信)을 따라, 나는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불현듯 다가올 황혼의 삶을 받아들이게 될 줄 안다. 이처럼 ‘조엘 오스틴’이나 ‘앤서니 라빈스’가 아닌 ‘서범석’이라는 평범한 작가를 통해 긍정의 힘을 더욱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긍정의 힘’을 저술한 조엘 오스틴은 목회자로서 1963년생이요,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를 저술한 앤서니 라빈스는 1960년생이다. 이들은 살아갈 날이 창창해서 ‘긍정의 힘’이나 ‘무한능력’을 설파하는데 일흔 중반의 서범석 작가보다는 호소력이 조금은 더할 것이다. 더구나 수십 년 동안 이 분야에서 활동해온 그들이다. 마찬가지로 경쟁 사회 주축인 젊은 사람들이 이런 자기계발의 가치를 받아들이려는 의지 또한 높을 수 있다. 하지만 평생 세파를 겪어온 노년의 삶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서 신앙이나 심리학이 아닌 농축된 깨달음이나 체험을 통해 특히, 노년의 자기 혁신을 깨우치는 저자의 가치는 그래서 나름대로 독자적 의미가 있다.
‘긍정과 꿈과 희망과 용기와 준비’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노년의 삶은, 문제의식이 그쪽에서 출발할 뿐 하나의 예시라고 본다. 따라서 저자의 독신(篤信)을 인생의 일부인 황혼에 한정하여 이해하기보다 젊은 날과의 연속성 아래 두고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인생처세론이나 자기계발론 등을 가치화한 자체가 아니라, 몸소 깨달으며 이를 깨우치고자 하는 주체가 황혼에서 내뿜는 열정이라는 사실이 놀라우며, 이런 가치 발견이 무기력하던 나를 부끄럽게 하고 니힐리즘(nihilism)적 사고의 반전을 꾀하게 한 것이다.
3. 노년기, 그 새로운 생장점
저자는 노년기를 아예 새로운 삶의 생장점(生長點)으로 접근한다. 무의식적으로 쓸모없이 흘러가던 황혼기를 재해석하고 시대 순응시켜 삶의 한 축으로 당당히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시들어가는 삶의 편린이 아닌 살아온 날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영역, 가장 아름답게 장식할 삶으로의 인식 전환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 스스로 생산적인 삶을 지어갈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며 그 자각이 늦을 때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나는 65세 나이로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30년 전이지요. … 중략 … 젊어 들어간 직장에서 그 분야의 최고로 인정받는 실력자가 되고자 나는 모진 노력과 힘을 기울였습니다. … 중략 … 그런 내가 30년이 지난 95살 생일 때, 자식들에게 케이크를 받으면서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가장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그 이후 30년은 비통할 만큼 부끄럽고 후회되는 삶이었습니다. 정년퇴직을 하고서 ‘이제 나는 다 살았다. 남은 생애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덤으로 주어진 삶일 뿐이다.’라는 그저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한 것입니다. 이는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런 덧없고 희망이 없는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던 저입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은 지금의 내 나이 95세로 따져 보아도 생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막대한 시간입니다.”
어느 작가가 95세 생일을 맞이하며 쓴 글 가운데 일부이다.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길고 긴 시간을 늙었다고 자포자기하며 허송세월로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뒤늦게 후회하는 그를 통해 95세까지 22년이 남은 내 나이를 가늠해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노년의 무한능력’ 중에서)」
정신이 번쩍 든 사람은 저자만이 아닐 것이다. 단순히 30년 세월이 아니라 ‘인생의 3분의 1’이라는 의미가 몹시 크게 다가온다. 노년의 삶이 왜 소중한가를 강조하는데 이만한 예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적절한 인용이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가 던진 화두 가운데 하나는 ‘인생의 3분의 1’을 어찌 경영할 것인가이다.
노인대학을 운영하며 그곳에서 강의를 하는 저자가, 절실하게 느끼고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은 ‘노년의 무한능력 인식 아래 긍정의 힘을 발휘하여 꿈과 희망을 설정’하는 일이다. 노년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맞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늙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 노년을 설계하고 준비하는데 철저하지 못하다.
저자는 물질적인 부분보다 정신적인 황혼 준비를 강조한다. 물질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정신은 석양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워야 ‘내면의 샘물’이 흐르고 ‘내면의 향기’가 나는 황혼이 된다. 자신도 모르게 들어서버린 황혼은 외로움이나 우울증 등 정신적 질곡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예컨대 홀로 되어도 이를 극복할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이를 위해 ‘황혼 교육’이 필요하다는 저자이다.
신용카드를 아무 생각 없이 쓰다가 결제일이면 몹시 무거운 부담을 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낭비하는 인생의 빚은 자신도 모르게 쌓여 노년을 불행하게 한다. 창조주가 주셨든, 누가 주셨든 결론은 스스로 창조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부여한 고귀한 생을 ‘인생의 하프타임’마다 ‘방향성’을 점검하지 못한 채 살아가거나, 자학하며 슬픔을 이기려 하거나, 패배주의로 물들어 있거나 하면 이는 모두 황혼의 부채로 쌓인다. 삶의 빚더미인 셈이다. 그 빚이 건강 악화로 오든, 그 밖의 불행으로 오든 살아온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조차 잃게 된다. 결국, 아무리 사회적 지성이 뛰어나더라도 우리 인생에는 별개의 지혜가 필요하며 그 지혜는 바로 서범석 작가의 ‘황혼의 그레이스 라이프’에서 찾을 수 있다.
4. 호주로의 활착
평일이건만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사정이 생겨 텅 빈 사무실을 혼자 지킬 때가 있다. 협소한 공간이라 해도 사무실이 텅 비어 있으면 희망이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민은 바로, 이 텅 빈 곳으로 들어가 외로움을 견디며 홀로 터를 개척하는 삶이 아닌가 한다.
이민을 한 사람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또한 그의 인품 여하를 떠나 나는 그들을 참으로 존경한다. 희망을 개척하는 용기와 도전 정신이 없다면 그리고 적극적이지 못하면 절대 이민을 꿈꾸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새로운 삶을 향한 지적감정(知的感情)이 풍부한 그들이다. 어쩌면 호주든 어디든 교민 가운데 문학을 하는 사람이 상당수인 까닭은 고국과 고향과 그 안의 가족 등을 향한 그리움이나 시름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전혀 생경한 환경에서 체험하는 지적감정의 분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개척정신이 남다른 이민자들이다. 조건을 갖추어 이민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실히 정착해가는 그들을 보면, 금이 간 아스팔트 틈새나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풀포기가 떠오른다. 언젠가 이런 틈새에서 올라온 코스모스 모종이 애처로워 화단으로 옮겨 심으려다가 그만 포기하였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도 뽑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힘을 더 주었다가는 오히려 몸통이 잘리지 싶었다. 주변이 온통 아스팔트로 뒤덮인 곳에서 살아남고자 자그마한 틈새에 내린 뿌리는 그만큼 강한 활착력을 보였다.
「… 영국 죄수들이 시드니에 정착하였을 때 멀리 남쪽에서 보인 커다란 산이 언제나 푸른색을 띠어 Blue Mountai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블루마운틴은 시드니 남쪽 해발 1000고지의 거대한 산으로 하늘과 붙어 있는 듯 구별키 어려울 만큼 푸르게 보인다. 그런 크고 늘 푸른 산이 매년 군데군데 불이 나면서 연기가 시드니 하늘을 뒤덮는다. 산불 이유 또한 검츄리 나뭇잎에서 발생하는 휘발 물질로 인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불이다. 호주는 매년 산불로 넓은 숲이 불타지만, 불탄 검츄리 나무는 잎이 탈뿐 나무 둥지는 살아 있어 다음해 다시 푸르게 잎을 피워 호주 숲은 항상 푸르기만 하다. 산불이 나면 작은 나무들은 타더라도 워낙 크게 자란 검츄리는 밑 부분의 나무껍질이 탈 뿐이어서 껍질을 벗으며 자라는 검츄리는 화상을 입지 않고 싱싱하게 살 수 있다. 오히려 불에 타면서 딱딱한 껍질로 된 씨앗을 터트려 어린싹을 틔우고 불탄 재가 거름이 되어 어린나무를 잘 자라게 해 준다.…」(‘호주의 나무들, 검츄리’ 중에서)
이번 「황혼의 그레이스 라이프」에서 새롭게 추가된 ‘호주의 나무들, 검츄리’의 일부이다. 이 검츄리라는 나무 학명은 ‘유칼립터스’란다. 저자의 표현을 따르면 검츄리는 캥거루와 함께 호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다. 시드니 블루마운틴의 검츄리 숲은 그 넓이가 우리나라 경기도 땅만큼 하다니 호주를 상징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저자의 이 작품을 통해 이 검츄리를 처음 알았다. 시드니의 오랜 가뭄에도, 잦은 화재에도 끄떡없이 견뎌내는 적응력과 생명력이 몹시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검츄리의 묘사가 마치 역경을 딛고 살아가는 교민의 삶처럼 경이롭게 다가온다.
「황혼의 그레이스 라이프」가 호주를 다녀와서 쓴 단순 여행기와 질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검츄리’를 보고 들은 느낌이 아니라 오랫동안 호주와 동고동락하며 부대낀 환경과 역사 안에서 이들 나무와 숲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행기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저자의 식견을 짚어보면, ‘호주 시민권을 가진 한국인’이 호주 안으로 온전히 동화하고자 하는 노력도 뒤따랐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아무리 낯선 땅이라 해도 내가 사는 곳,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곳이라면 애정이 밴 노력 없이 동화되기를 바라지 말라는 저자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왜냐하면 호주의 자연과 사회제도, 호주 역사와 원주민, 호주의 이민자와 애환 등을 바라보는 해박한 혜안이, 자신이 머무는 땅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로 비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숱한 외국 여행기가 책으로 출간되어 그 가운데는 독자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책들이 있다. 이는 여행기에서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흥미와 여행 노하우를 얻는데 초점이 맞추어졌을 것이다. 만일 독자가 「황혼의 그레이스 라이프」를 읽고 흥미와 관심을 넘어 호주와 금세 친해졌다면 저자로서는 책을 출간한 보람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호주를 막연히 알던 필자 역시 처음 「황혼의 찬가」에서 얻은 관심을 벗어나 이제는 마치 내가 살다 온 곳처럼 친근해진 기분이다. 이는 「황혼의 그레이스 라이프」가 지닌 또 하나의 의미이며, 이 신선한 책을 읽는 누구나 호주와 쉽게 친해질 것이요, 호주를 이처럼 잘 이해할 수 있는 원고를 만난 나는 행복하다. 어찌 보면 호주 정부로서도 저자에게 깊이 감사해야 할 일이다.
5. 메지 내기
「황혼의 그레이스 라이프」 안에서 흐르는 지류의 끝은 ‘긍정과 꿈과 희망과 용기와 준비’라는 바다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면 아침 눈을 뜨는 일조차 행복하고 세상의 향기를 날마다 새롭게 느끼면 우리네 삶도 한없이 향기롭다는 음성, 자신의 속내를 감추려는 포커페이스(poker face)보다는 진솔하게 밝히고 표현하라는 저자의 음성을, 나는 「황혼의 그레이스 라이프」에서 들었다. 또한 원고를 읽는 내내 지천명의 가슴이 가늘게 떨렸다. 이제 늙음이 두렵지 않으며 내 안의 희망이 탄력을 받았다. 더불어 내 안의 꿈도 더욱 선명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저자의 신념을 좇아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해도 이제는 모든 부정적인 틀에서 멀어지고자 한다. 우리는 이 책 안에서 삶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다. 사뭇 선동적인 작가의 안식(眼識)을 신뢰하며 그의 긍정적 신념에 단단히 세뇌당하였다.
나의 노후가 하릴없이 파고다 공원을 배회할 것인가, 나는 저자의 펴내는 글에 주목하였다.
「…‘뜻밖의 발견이 엄청난 행운을 가져 온다.’라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나는 평생 가슴으로 품어왔다. 이는 바라고 원하는 일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주므로 항상 받을 준비를 하다가 기회가 오면 꼭 잡아야 한다는 신념이다. 이 신념을 바탕으로 남들이 100미터를 뛸 때 10미터를 더 뛰다 보니 어느 시점부턴가 자신이 놀랄 만큼 성장해 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임계점(臨界点)이 올 때까지 계속 10미터를 더 뛴 결과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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