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록어미의 금연 에세이1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가을이 같잖아서 동생 집에서 술을 한 잔 마셨다.
아우는 어릴 때 하도 말라서 별명이 ‘빼빼’였다. 녀석의 아들인 윤후도 어지간히 빼빼다. 아우는 얼마 전 사고로 또 내 간덩이를 주물럭대며 한 달 가까이 입원해 있었는데 그 탓인지 살이 후줄근히 내렸다. 포동포동 살이 오르면 좋을 윤후나 섭생(攝生)을 하는 아우한테 보약 한 재 못 먹이는 자신이 한심해서인지 소주는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참 쓰기도 한 소주 맛 사이로 넉 달 여 동안 간신히 떼어놓은 담배 생각이 우꾼하게 일어났다. 여전히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다. 담배를 끊은 지 7년째인 아우는 연방 입맛을 다시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짐 술기운을 매단 채 사무실로 돌아왔다. 텅 빈 사무실에는 가을의 고요가 어둠과 뒤엉켜 술 취한 감성을 더욱 부추긴다. 한 대 빨고 싶은 충동이 입을 바싹 태우며 소줏불처럼 뿜어 나왔다.
가을은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다가왔다. 며칠 전 5층 사무실 발코니로 나갔더니 내려다보이는 은행나무에서 가을이 노랗게 홰를 치고 있었다. 거둘 게 별로 없는 가을이라 하지만 여름 한 철 담배 없이 견뎠으니 내 안 어딘가 꽃 한 송이 사리처럼 피었지 싶다. 밤낮으로 쏟아지는 서염과 시도 때도 없이 발연하게 일어나는 담배 욕구를 짓누르는 일이, 어디 봄부터 울어댄 소쩍새의 번뇌보다 못하랴. 30여 년 동안 함께하면서 단 하루도 참아내기 어려울 듯하던 금연을 어찌 넉 달 동안 이어가는지 내 자신도 놀랄 일이다.
단 하루 참으려면 줄줄 식은땀을 흘려야 하는 담배, 오죽하면 상사초(相思草)라 이름 하였을까. 아마 이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 자나 깨나 잊지 못하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생각나고 몹시 그리울 때 그 그리움을 삭히고자 피우는 담배이기도 하다. 비슷한 의미에서 담배는 근심을 잊게 한다 하여 망우초(忘憂草)라는 이름도 있다. 우연찮게 국어사전에서 검색해본 담배와 연관된 말이 5백여 개가 넘었다. 거기에는 상사초나 망우초처럼 나름 멋스러운 이름이 있는가 하면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이름도 있었다.
아버지나 형 산소에 찾아가 술잔을 올릴 때면 나는 늘 담배 한 개비도 태워 올렸다. 어릴 적 아버지가 하시던 대로 따라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가 담배를 끊었으니 두 분도 애먼 금연을 하게 생겼다. 불교에서 쓰는 향공양(香供養, 향고양의 원말)이라는 말이 있단다. 부처님 앞에서 향을 피우는 일 또는 절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을 뜻한다는데 담배 향을 ‘공양’하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담배를 영초(靈草)라 불러도 딱히 시비할 일이 아니다.
여행할 때 가지고 가는 담배를 행초(行草)라 한다. 고속버스를 타고가다 휴게소에서 내리면 담뱃불부터 붙여 거푸 두 대씩을 피우던 맛, 열차 여행을 하다가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피우던 담배의 맛을 이제는 그만 내려놓았다. 열차 전량이 흡연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고향으로 가는 5시간의 열차여행은 고역이었다. 그 다섯 시간을 참지 못해 금연구역임에도 매번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몰래 피우던 용고뚜리였다. 이처럼 담배 피우는 일이 떳떳하지 못해서 그런지 유독 담배를 이르는 은어가 흔하다. 기생지팡이, 개꼬리, 모야는 담배를 이르는 죄수들의 은어란다. 용추, 양덕초, 연추는 심마니들의 은어이며 뿌시개는 학생들의 은어 그리고 고배담은 소경들의 은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이 지금은 안 쓰이지 싶다. 교도소에서도 흡연이 허락되고, 학생들 흡연이 심각할 정도로 널리 퍼진 요즘이기 때문이다.
담배의 또 다른 이름이 심심초라는데, 말 그대로 심심풀이로 한 대씩 피우면 좀 좋으랴. 담배를 지나치게 피우는 사람을 철록어미 또는 용고뚜리라 부른다. 예나 지금이나 골초는 따로 있는 모양이다. 나 역시 천덕꾸러기 같은 골초였다. 담배를 피우면서 당한 천대나 수모를 생각하면 노모 말씀대로 소가지도 없는 놈이었다.
명세범씨의‘내 인생 파라과이’라는 원고를 정리하자니 재미난 글이 있다.
만약 담배가 몸에 좋다면
수험 공부하는 딸에게 어머니가 이른다.
“얘야!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담배 한 대 피우고 하렴.”
그러자 아버지가 거들었다.
“그래, 엄마 말 대로 담배 한 대 피우 거라. 저기 여보! 우리 딸 열심히 공부하는데 빨리 가서 담배 한 갑 사오구려. 우리 애 잘 피는 거로 말이요.”
학교 조회시간이면 침울한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들! 아침에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다들 담배 한 대씩 물고 시작하자.”
“선생님, 저는 담배 안 피우는데요.”
“도대체 너는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니? 그러니까 니가 공부도 못하는 거야.”
줄담배를 피우는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하는 말,
“짜식! 자기 몸은 되게 생각한다니까.”
정말 보약 같은 담배는 없을까.
2009년 6월 27일 눈 뜨자마자, 나의 금연은 시작되었다. 금연 7년째인 아우가 술을 마시면 지금도 담배가 당긴다는 말을 할 때는 그저 아득하여 눈앞이 캄캄하다. 그러면서 겨우 넉 달 주제로 금연 일기라니 피식 웃을 일이지만 일기라도 쓰면서 스스로 다져 놓으려 한다. 대부분 결심은 순간적인 충동을 물리치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모를 비롯하여 그간 내 흡연으로 고통 받은 주변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미리 다스려 두면 울뚝밸처럼 불거진 욕구도 슬며시 눌러 내리지 싶다.
가을이 깊어간다. 이즈음 나는 기침을 달고 살았었다. 올가을 이후로는 풀벌레 소리를 감상하며 잠들 날이 있을 줄 안다. 기침 없는 밤, 아주 평화롭게.
출처 http://cafe.daum.net/w12836
(매주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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