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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바른 이해//수필과 에세이

7154 2012. 9. 12. 09:24

 

 

 

수필의 바른 이해

 

 



최근 들어 수필 인구가 많이 늘어나 수필을 곡해(曲解)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폄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수필이 문학이야?"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제출한 보고서나 논술을 보고 "수필을 썼구먼"하기도 한다. 아직도 수필문학이 가야할 길이 멀고 잘못된 인식타파가 시급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여 필자는 수필의 총론에 해당하는 정의와 어원, 그리고 종류와 특성에 대해서는 그래도 논서와 싸이트에 많이 나와 있음으로 생략하고 곧바로 수필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수필은 어떤 글인가'에 대해 짚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수필을 쓰기 전이나, 이후에도 수필은 ' 붓가는 대로 쓰여지는 글'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너울이 끼치는 해악은 실로 우심하다.

성의 없이 써도 되는 것으로 오해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여기(餘技)의 문학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의가 잘못 된 것은 아니고, 이해를 잘못한 데서 오는 오해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자연스럽게 써지는 글이라는 것을 간과한데서 온 오류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소설처럼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문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제재의 제한을 받는다. 이것만하더라도 얼마나 큰 제약인가.

그래서 김태길 선생 같은 이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조건을 '인격이 더 없이 탁월하고, 글 솜씨 또한 탁월해야' 함을 강조하며 그 제약을 극명하게 언급한바 있다.
일찍이 알베르스(R.M.Alberee)는 '에세이는 그 자체가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되어진 문학'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성을 기반으로 하되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정서적이어야 함이 필수라는 조건을 달고 있는 것이다.

수필은 우리 생활 속에서 직접 겪은 일을 가지고 쓰는 체험의 문학이다. 그래서 필자의 심적 나상(裸像)이라고 흔히 비유된다. 또한 수필은 그 범위가 일기에서부터 해학과 비평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으며, 제재도 거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문학이 되어야 하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일찍이 윤오영 선생은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수필을 곶감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형태상으로 소설이나 시는 잘못되어도 소설이나 시로 보아주지만 그러나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글이 수필처럼 써졌다하더라도 정서적인 여과과정을 거친 글(문학성)이 아니면 수필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차차 설명하기로 하겠다. 아무튼 왜 수필이 감이 아니고 굳이 곶감인가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야할 문제다. 수필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글쓴이의 인품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인격을 닦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남에게 지탄을 받은 사람이 좋은 소설이나 좋은 시를 쓰면 인정을 받을 수 있지만, 수필이 그렇지 않는 것은 그 소이가 여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기처럼 자기만 보고 마는 글이 아니라면, 새롭게 태어나는 글이어야 한다. 새로운 소재를 찾아 새로운 생각과 기법으로 써야한다. 독창성을 발휘하여 남과 차별화 하는 것을 포함해 자기 작품별로도 차별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사람의 가수로 태어나려면 많은 노래를 불러보고 소화를 해야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모창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진정한 가수가 되려면 마침내는 자기 목소리를 찾고 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필을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모방도 하나의 공부방법이며 용납이 되지만, 그러나 진정한 수필가로 태어나 새 출발 할 때는 분명한 자기만의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공부는 필수인 것이다. 필자는 천학비재(淺學菲才)하여 학문적으로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왕에 장이 마련되었으니, 비록 사무실에 앉아 설계도는 그리지 못하지만 한데서 갖은 자질구레한 목수 일을 해본 사람으로서 함께 토론하고 공부를 한다면 무언가 얻어 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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