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13 소풍
마른 풀 섶 사이로 짙은 청보리 빛깔의 풀들이 눈 시리도록 반갑습니다. 꽃샘바람은 아니지만 바람이 차갑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아무리 차가운들 이미 와버린 봄입니다. 잊지 않고 찾아준 봄이 고맙습니다. 때마다 이 아름다운 계절을 베풀어주니 감사합니다.
봄뜻이 물씬한 안양천을 걷다보니 어릴 적 소풍가던 날 아침이 떠오릅니다. 소풍 가기 전날, 밤새 빗소리가 들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났는데 햇살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치고 있을 때 몰려드는 환희를 기억할 겁니다. 아무리 꽃들이 지천일지라도 그처럼 아름다운 봄날은 없었습니다. 뽀송뽀송하게 씻겨 햇살을 받고 있는 세상을 보며 미소를 절로 지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 기억 속의 아침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환해집니다.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특별히 감사합니다. 사로잡힘에서 풀려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날마다 야근하다시피 이어진 일상,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간단히 샤워만 한 채 바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을 느끼지 못한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바깥 기온은 점심때에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듯이 그런 생활을 오랫동안 이어왔습니다. 그것은 불안함, 조급함 때문이었습니다. 자정 전에는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든 꾸물거리다가 새벽 두 시를 넘기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일을 한다고 하여 일의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제 만족일 뿐, 건강만 잃었습니다.
이제는 일찍 자고 아침마다 운동을 나갑니다. 사로잡혀 있는 데서 탈출한 것입니다. 물론 병원의 경고가 있기는 하였으나 습관처럼 묶여 있던 것을 풀려고 하니 풀렸습니다. 두려움, 불안함, 조급함에 반항하며 땀을 흘립니다. 아침에 잠깐 흘리는 땀이 온종일 기운차게 합니다. 아침을 감사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침을 감사하게 만드니 소풍 가는 날 아침처럼 가슴이 설렙니다.
우리는 매일 세상 속으로 소풍을 갑니다. 축복처럼 소풍이 준비된 아침입니다. 밤새 뽀송뽀송 씻겨 햇살이 퍼붓고 있는 나의 비 갠 아침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에게도 그 아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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