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리고

깊은 어둠 속에서 나를 Y에게 맡기고(안양천트레킹, 한강트레킹, 샛강트레킹, 밤길트레킹

7154 2016. 2. 10. 13:58

깊은 어둠 속에서 나를 Y에게 맡기고





 

 

가로등 불빛들이 찬란하게 타오른다. 줄지은 불기둥과 여기저기 불꽃이 탐스러운 안양천 야경이 이국의 풍경처럼 비친다. 하지만 안양천 야경이 때로는 어지러이 흔들리는 세상사 번뇌처럼 다가와 마음을 심란케 할 때도 있다.

천변을 걷자니 발소리에 놀란 겨울새들이 서둘러 물가 풀숲을 벗어나며 어둠 속 파문을 일으킨다. 이 시간 누군가 둔탁한 발소리로 저들을 깨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겨울새들의 단잠을 깨워 참 미안하다.

밤 10시, 구일역 안양천에서 한강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설 닷새 연휴 가운데 하루가 엉거주춤 사라져 간다. 하지만, 아직 여유가 한껏 있어 묵주기도 트레킹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세상에 홀로 남은 기분이다. 일상의 편린조차 묻어버린 채, 세상사 근심 없이 허락된 시간이 경건하고 감사하다. 어두운 강변을 홀로 차지하여 걸을 수 있는, 특별히 나에게만 허락된 시공이다.

 

서너 해 전부터 묵주기도를 하며 밤길 트레킹을 하다 보니 어둠 속이 어느새 환한 대낮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풀숲을 스치는 까칠한 바람소리나 불쑥 나타난 어둑서니에도 소스라치던 밤길이, 때로는 그분 품 안처럼 신령스럽고 편안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조금 환한 구간을 걸으면 오히려 분심이 일어난다. 사위가 어둡고 고요할수록 내 靈(영)은 더 침잠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그만 돌아갈까.

오늘 따라 피곤도 하거니와 더 적적하다. 하지만 적적할수록 그분께 나를 좀 더 집중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묵묵히 걷다가, 어느 덧 안양천 하류를 벗어나 한강 합수부에 다다랐다. 다른 때 같으면 늦은 시간에도 자전거 타는 이들이나 강변 트레킹 하는 이들이 쉬고 있을 곳이지만, 오늘은 빈 의자들만 휑할 뿐이다. 강물조차 꽁꽁 얼어 있으니,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듯하다.

건너뜸 하늘공원 불빛을 바라보며 잠시 앉아 쉬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혹여 기도가 필요한 분은 메시지 주라는 글을 페이스북에다 남겼다. 형을 떠나보내기 전‘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노래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었는데, 이후로 나는 그 노래의 ‘누군가’가 기꺼이 되어주곤 한다.

 

영적 주파수를 그분께 맞추며 한강변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국회의사당까지 내려가 샛강으로 접어들어, 63빌딩과 마포대교 아래까지 걷게 되면 새벽 서너 시쯤 될 것이다. 어릴 적 형이랑 둘이 밤길을 걸을 때면 형에게 바싹 달라붙어 걸었듯이 지금은 그분께 바싹 의탁하여 걷는다.

묵주기도를 잠시 멈춘 채 내 주변의 아픈 이들, 장애인 자녀를 둔 지인들 가족, 노모를 비롯한 내 가족들, 어른들에게 학대를 당하거나 아프거나 굶주린 세상 어린이들,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 병마로 고통 받는 이들, 우리 해드림출판사와 저자들을 차례로 떠올려 동행하자니, 어느덧 샛강 입구까지 내려와 있다.

밤길을 걷다보면 특별히 떠오른 두 사람이 있다. 어둠 속에서 아주 포근하게 빛나는, 웅장한 城(성)처럼 지어진 고급 아파트 불빛을 바라보면 시골에서 홀로 지내는 노모가 떠오른다.

 

몇 편의 단편소설과 중편소설 ‘겨울새’가 실린 소설집 [겨울새], 박옥순 소설가의 이 소설집을 출간한 이후, 나는 밤길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 ‘겨울새’에서 주인공 소혜는 마음 치료 훈련에 참가하게 된다. 어린 시절 겪은 불행과 더불어, 사회에서, 시댁에서 그리고 남편에게 받은 상처들이 더께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훈련 프로그램에서 소혜는 과거 조폭 출신의 파트너와 미끄럽고 험난한 산 정상을 향해 걷는다. 눈을 단단히 가린 채 파트너의 손을 잡고 오직 그에게 의지하여 산속을 걷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혐오스러운 인상의 파트너지만 눈을 가린 채 잡은 그의 따뜻한 손과 그의 자상한 이끌림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으며 치유가 되어 간다.

 

내가 눈을 완전히 가리고 낭떠러지 한강변을 Y에게 의지하여 걸으면, 언젠가 그의 발을 한 번 씻겨줄 때처럼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가난한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극심하게 갈등하고 충돌하였던 오랜 시간을 통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쌓인 내 안의 모든 어둠을 보았고, 그 어둠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았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보았고, 내 안의 상처가 얼마나 깊이 쌓여 있는가를 보았다. 내 곁에서 그런 질곡과 백발을 견디며 지금껏 같이 있어준 Y에게 나를 맡긴 채 어둠 속을 걸으며 그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나에게 받았을 상처들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것이다.

지난 날 나는 걸핏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에게 눈물짓게 하였었다.

예전 TV문학관이나 MBC베스트셀러극장 같은 작품들이 모인 [겨울새], 내 안의 겨울새들도 훠이훠이 날아가도록 머잖아 Y와 한 번 밤길을 나서야 할 듯하다.

이즈음 그분도 내게 말씀하신다.

“눈 감고 걸어오라.”

 

도시의 밀림 샛강으로 들어섰다. 샛강은 마치 수십 년 동안 인적을 거부한 비무장지대를 연상케 한다. 나의 밤길 트레킹 코스 가운데 두려움이 스멀스멀 도사린 곳이지만, 이제 나는 가장 무서운 곳에서 가장 포근함을 맛보곤 한다.

샛강은 묵상 걸음으로 1시간 남짓 거리이다. 단단히 얼어붙은 샛강에서는 음산하게 정적을 깨트리며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있다. 얼음이 갈라지거나 금이 가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무언가 강을 건너와 나를 금세 덮칠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하였다.

샛강의 첫 번째 다리 밑에는 여전히 노숙자가 잠들어 있다. 이 다리 밑에서 벌써 세 번째 겨울을 나는 그를 본다. 며칠 전 혹한에도 이곳에서 잠들었을 것이다. 그는 바람막이로 머리맡에다 우선을 펼쳐놓기도 하는데, 자연 속에서 노숙하느라 한뎃잠이 익숙해져 있을까, 차량이 질주하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깊이 잠들어 있다. 샛강을 걸을 때면 내게 저 차량 소음이 위안이 되기도 하듯이, 그에게도 저 소음이 외로움을 덜어주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있는 영등포 역사 같은 의지처를 피해, 나 같은 사람 이외는 인적 없는 샛강 다리 밑에서 노숙하는 그를 나는 조금은 이해할 듯도 싶다.

 

트레킹을 마치고 사우나로 들어오니 새벽 세 시 반이었다. 다섯 시간 정도 걸은 모양이다. 옷을 벗다가 문득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페이스북에서 누군가 메시지를 보내온 표시가 있다. 내가 올린 글을 아마 트레킹이 다 끝날 무렵에서야 본 듯하다.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자니 가슴이 턱 미어진다. 생각 같아서는 걸어온 길을 다시 걷고 싶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전 아마도 조만간 세상을 떠날 것 같아요…. 암 판정 2년 채 안 됐지만… 전이가 빨라 더는 해결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순간순간 화살기도도 필요합니다.

극악한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하니까요.

전 님을 잘 모르지만 이 시간 간절히 기도를 구해 봅니다.”

 

이 시간까지 잠 못 이루고 있었을까 싶으니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예의가 아닐지라도 이 메시지를 그대로 옮기는 까닭은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의 그 누군가가 많아지기를 간절히 두 손 모아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또 그럴 것이라 믿는다.

 

이번 트레킹으로 나는 몸살이 나고 말았다. 어쭙잖게도 내가 몸살이 나도록 기도하였을까 싶으니, 설날 차례를 못 지낼 만큼 누워 있었어도 靈(영)은 맑기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