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문득문득

금호고속의 아름다운 만남, 실제 사연

7154 2019. 4. 16. 13:52

 

금호고속 힘내라!! 금호고속에서 만나 금호고속으로 이별하였던 추억

 

 

열차나 버스 안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이 있었다. 고속버스에도 재떨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보편적인 우리 의식수준이 그랬다. 그뿐만 아니라 예쁜 승무원도 있었다. 운행 중 종종 승무원이 통로를 스칠 때면 아찔한 현기증이 일곤 하였다. 승무원이 하도 예뻐서 짝사랑하듯 몸살을 앓는 때도 있었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세대이니 나도 꽤 삶의 연륜이 쌓인 모양이다.



중학교 졸업 이후 서울 생활을 하면서 고향 순천을 내려갈 때면 꼭 금호고속을 타곤 하였다. 어렸지만 고향 기업이라는 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름 있는 호남기업이 거의 없던 시절, 해태나 금호고속은 호남 사람들에게 특별히 친근한 존재였다.

통일호나 비둘기호 열차를 타는 것보다, 고속버스를 타면 폼이 좀 났다. 비록 고향 가는 길이었지만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을 간다는 설렘 외에도, 여행 기분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다. 버스 안에서 마음껏 책도 읽고, 차창을 바라보며 시(詩)든 에세이든 끄적거릴 수 있는 낭만이 있었다. 밤 시간이면 깊은 어둠 속에서 차창을 통해 고즈넉한 상상과 상념들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여행을 가면 가슴을 설레게 한 가장 큰 이유 하나가 있었다.

바로 예쁜 여자와 동석해 가는 것.

그땐 서울에서 순천까지 6시간 남짓 걸렸다. 여자에게 작업(?)을 걸어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먹을 게 있으면 나눠먹기도 하고, 휴게실에서 특별한 음식을 사서 건네기도 하였다.


매번 내 옆자리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는 아저씨나 아주머니만 앉아 풍선 바람 빼듯 설렘을 빼버리더니 그날은 스무 살 남짓 내 또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고속버스를 자주 타고 다니는 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가슴에서 벚꽃이 휘날렸다. 앉자마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뜸을 들이다가 한 시간쯤 지나서야 ‘순천이 고향이세요?’ 하고 물었다. 그땐 그런 물음이 대화의 물꼬를 트는 상투적인 말이었다. 그녀는 순천 시내가 집이었고, 나는 시골 출생이었다. 다만, 일찍 서울 물을 먹어서 도회지풍의 꼬락서니가 나름 서 있는 나였다.


무슨 말만 건네도 얼굴이 붉어지던 그녀, 순천에 도착해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은 우린 결국 연인 사이가 되었다. 입대한 이후에는 강원도 오지까지 겁도 없이 면회를 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오랜 수험생활을 그녀는 기다리지 못하였다. 아니, 그녀가 아닌 그녀 부모님이 내 싹수없음을 간파한 것이다. 나도 그녀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할 처지가 못 되었다.

부모의 성화로 맞선을 보게 된 그녀와는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서울 직장을 정리하고 순천으로 내려가는 금호고속에 그녀가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서 그녀는 끝내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떠나갔다. 여자보다 사법시험 합격이 절박하였던지라 그럭저럭 이별의 아픔을 삭일 수가 있었다.

지금도 순천엘 내려가면 괜히 두리번거려지곤 한다.

 

요즘 연일 아시아나 그룹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그룹이 몹시 힘든 모양이다. 그룹 총수나 회사 사정을 나는 모른다. 다만 어릴 적부터 정이 쌓였던 금호고속도 힘들어 할 거 같으니 마음이 짠하다. KTX가 생긴 이후로는 거의 고속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순천까지 이제 2시간 반도 길게 느껴질 만큼 KTX의 빠른 속도에 젖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고향 기업이 힘들다니 그래서 좀 미안하다. 앞으론 좀 늦더라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열차 대신 프리미엄 금호고속을 이용해야지 싶다. 툭 하면 발 아프다며 업어달라고 하였던 옛날 그녀와의 시간들도 떠올리고, 마누라한테 얻어터지지 않을 만큼 옆자리의 여인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