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보도자료★★

배재록 수필집 '내 기억 속 풍경화'

7154 2019. 8. 31. 12:39

 

그리운 날의 풍경, 토포필리아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를 잊고 현재에 묻힐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포근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유년기 속에 있는 흑백 사진처럼 아련히 남아있는 인정을 배재록은 오늘날의 건조한 풍요와 대비해 촉촉한 모습으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이것을 저것으로 치환하는 문학 원리가 수필의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에 그의 글은 문학적 성취도 빛난다. 대단한 필력이다. 다소 안정된 공간에서 배재록이 마주하는 수필적 공간은 유년의 애환을 담은 애련한 사진으로 인식된다. 하늘을 안고 들어온 햇살이 모인 과거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여러 특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장소애, 바로 토포필리아라 하겠다. 그의 수필집 첫 작품은 책의 제목으로 쓰인 <내 기억 속 풍경화>다. 아주 적절한 배치라 하겠다.

 

온 세상이 달빛에 비치는 날이면 기억 속의 풍경은 그을음 솟는 호롱불처럼 깜빡거린다. 산이 높아 둥그렇게 내민 하늘은 끊임없이 다양한 그림을 그려낸다. 별빛이 꽃이 되어 지천으로 피면 거대한 대자연의 영화화면 같은 하늘은 풍부한 감성을 키우게 했다. 67km 산을 닦아 만든 물길을 우렁우렁 흐르는 왕피천은 내 유년의 큰 보고다. 내 눈을 뜨이게 하고 애인이 되어 유년의 나를 소환한다. 물빛 무희를 하면서 내 기억 속으로 다가온다. 긴 낚싯대를 물속에 던져 센 물살로 단련된 물고기를 건져내던 강태공. 가난했지만 물속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는 배고픔을 물리치게 한다. 물새 울던 왕피천 물줄기가 은빛 햇살로 반짝이며 향수를 곱씹게 한다. 입술이 새파랗게 되도록 자맥질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 <내 기억 속 풍경화>에서 -

 

배재록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가장 두드러진 그림자 형상은 ‘왕피천’에 대한 짙은 그리움과 가시지 않을 짙은 향기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유년 시절의 추억은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독 그에게는 강하다. 그러기에 왕피천은 그의 눈을 뜨이게 하고 애인이 되어 유년의 그를 소환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의 대다수 작품들은 과거 회고적 그리움으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배재록이야말로 눈물의 습기를 통해 황홀한 기적을 만나는 작가다. 수필이 실존적 불안을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있다는 점이 배재록 수필의 강점이다. ‘물새 울던 왕피천 물줄기가 은빛 햇살로 반짝이며 향수를 곱씹게 한다’라는 벼랑 같이 느껴질 정도의 미학적 사유가 녹아든 어구를 적재적소에 놓을 때까지 그는 감각의 촉수를 수없이 갈고 닦았으리라 본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온 세상이 달빛에 비치는 날이면 기억 속의 풍경은 그을음 솟는 호롱불처럼 깜빡거린다. 산이 높아 둥그렇게 내민 하늘은 끊임없이 다양한 그림을 그려낸다.’라는 표현은 그의 수필가적 문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공감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 형상화의 표본이다. 어떻든 그의 수필은 인문학적 사유로 공감을 주기 때문에 멋과 맛뿐만 아니라 향기를 지닌다. 그 향기는 내면의 솔직함에서 나온다.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되기에, 향기가 난다. ‘가난했지만 물속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는 배고픔을 물리치게 한다.’는 대목은 배재록에 있어서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음을 증명한다.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낸 결과라 하겠다. 위의 인용 예문 말고도 여러 수필을 보면, 그는 어둠 속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피안의 세계를 가진 작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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