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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두무덤

7154 2007. 10. 1. 20:06
 

               작두 무덤

                              김 창 애





  서울에서 생활하는 조카가 여름휴가라며 내 집을 찾아왔다. 촌수로 따지자면 팔촌쯤이나 되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친지지만 그 조카를 대하는 내 마음은 항상 애잔하다.

  여름이 나뭇가지에 걸린 낮달처럼 제 빛을 잃고 있을 이즈음에야 여름휴가를 오게 덴 데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나 그런 시기를 피해 다니는 조카의 습성 탓일 게다.

 조카는 유독 고구마를 좋아한다. 특히, 어린 시절 겨울밤에 먹었던 단물이 질질 흐르는 고구마를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기를 참으로 좋아했다. 나는 그 조카를 생각하며 고구마 넝쿨을 헤집는다. 어릴 때 먹었던 단물 흐르는 속살이 노란 고구마는 이제 품종조차도 구하기 어렵지만 나는 매해 별 소득도 없는 고구마 농사를 짓는다. 가족, 그 누구도 특별히 고구마를 즐기는 편이 아닌데도 말이다.

 연례행사지만 미리 대비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홍수나, 장마, 그리고 가뭄 때문에 여름 농사는 언제나 하늘에 맡겨야 한다. 지난 장맛비에 씻겨 내려 폭격 맞은 산등성이처럼 앙상한 옹이만 남은 고구마 밭에 십리, 오리, 가다 한그루씩 남아 있던 고구마 순이 어느새 그 넓은 밭을 녹색천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고구마 밭도 넝쿨을 제쳐보면 온통 상처투성이다. 오랜 장마와 강한 태풍으로 찢겨지고 토막이 나 온전한 사래가 한군데도 없다.

그래도 고구마 넝쿨은 지금 땅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로 살을 찌워 알알이 제 새끼를 품고 있을 것이다. 상처의 아픔보다는 생명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일이다.

 조카는 옛 맛이 아니라면서도 속살이 팍팍한 고구마를 열무김치국물에 적셔 가슴을 탁탁 치며 목으로 넘기고 있었다. 오른손잡이인 조카는 습관적으로 왼손으로 고구마를 집어다 오른손에 갖다 쥐어준다. 고구마를 쥐고 있는 조카의 손가락을 보며 나는 가슴에 아릿한 통증을 느낀다. 국물이 있어야 넘길 수 있는 밤고구마의 섬유질 같은, 삼킬 수 없는 아픔이다.

 조카는 오른쪽 검지가 없다. 유리 파편으로 찔러대지 않아도 살짝만 건드리면 그대로 피를 흘리며 다가올 것 같은 공포. 없어져 버린 손가락에 대한 우리 가족과 그 조카가 느끼는, 그것은 오랜 상처이다. 아직도 아물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고개를 삐죽이 내밀곤 하는….

 내 친정아버지는 오래된 것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새로운 것이나, 편리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익히 손에 익은 것, 정이 든 것에 대한 애정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아버지께는 쇠로 된 아주 무거운 작두가 있었다. 할아버지 대 때부터 물려 내려온 불편하기 이를 데 없고 운반하기도 버거운 마을에 단 하나 있었던 골동품작두. 그 작두를 평평한 바닥에 고정시키고 디딤 발을 해 놓고 한 발로 디디고 선다. 그리고 작두 칼날 손잡이에 줄을 달아 손에 잡고 다른 발로 작두를 밟아 끌어 올렸다 내리면 작두의 무게에 풀이 잘려 나갔다.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온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의 작두를 빌려다 퇴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에 대한 아버지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후에 가볍고 편리한 새로운 작두가 나왔어도 아버지는 여전히 무겁고 힘든 작두만을 고집하셨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나 손잡이만 잡고 힘껏 누르면 풀이 싸악 싸악 잘려 나가는 새로운 작두로 풀을 썰었다. 새로운 작두가 사람의 힘과 잘 벼린 칼날에 풀이 베어지는 것에 반해 아버지의 작두는 작두의 무게로 인해 풀이 베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표정만으로도 우리 가족들을 당신의 뜻에 순종하게 하는 아버지의 위엄을 닮아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작두에 더 큰 애착을 가지셨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그 해, 내 남동생과 동갑나기 조카는 아버지의 그 작두를 장난감쯤으로 여기며 산에서 베어온 나뭇가지를 자르며 놀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그 작두가 얼마나 위험한 기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두 아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움직이기도 버거운 작두를 가지고 놀았고 어느 순간 조카의 오른쪽 검지가 작두에 잘려 나갔다.

 손가락이 잘렸을 때 그 자리에서 붙이면 그대로 붙는다고 하지만 어린 두 아이가 그럴 경황이 있을 리 없었다. 팔딱이는 손가락을 들고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섬이라 병원도 없고 보건소도 없었던 시절, 배를 타고 육지로 가는 동안 이미 절단된 손가락의 신경이 손상되어 손가락을 봉합할 수가 없었다.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 잘려나간 조카의 손가락을 묻으며 공포에 떨던 동생의 얼굴은 우리 가족에게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악몽이다. 잘못이라고는 같이 놀았다는 것 밖에 없는 동생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 후유증은 동생의 인생마저도 암울하게 만들었다. 딸 다섯을 낳고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에 대한 애정을 알기에 아버지의 매질은 더 애달프고 처절했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나는 내 아버지가 자식 그 누구도 그렇게 무섭게 때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혹 내 동생이 죽는 건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가슴에 멍울져있었을 눈물은 조카의 잘려진 손가락에서 나오는 피만큼이나 붉고 진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아버지의 몽둥이에 맞은 동생의 온 몸은 퍼렇게 피멍이 들고 불긋불긋 애가 져 있었다. 그 때문에 동생은 보름 이상을 방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죽음보다 더한 침묵이 집안 곳곳에 배여 있고 동생은 불안해하며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동생의 몸에 나 있던 매 맞은 상처는 보름쯤 지나자 딱지가 앉고 새 살이 차올라 깨끗해졌지만 친지나 내 부모님과 우리 가족에게 남겨진 상처는 세월이 가도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남동생은 그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한다. 무슨 일을 시작하건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망설이며 두려워한다. 그날, 아버지는 평생 버리지 못할 줄 알았던 작두를 당신의 가슴에 한으로 묻었다. 그리고 남들처럼 새로운 작두를 장만했다.

 조카의 대인기피증도, 남동생의 소심증도 그때부터 시작된 아픔일 것이다. 고통이 있다고 상처를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런대도 나는 자꾸만 피하고 싶다. 그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다. 웅크리고 있던 고통은 언제 어느 때고 예고도 없이 툭툭 튀어 나온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 악수를 할 때, 예쁜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 신체검사를 할 때, 하다못해 길거리에 떨어진 휴지 한 장을 줍게 될 때에도….

그것은 무덤처럼 음울하다. 조카는 손가락이 하나 없어 군대도 면제받았다며 애써 웃지만 그것은 서로의 마음에 짐을 덜어내고 싶어 하는 가슴 아픈 위로일 뿐이다.

 그 사건이 있고 지금까지 조카와 남동생은 한 형제처럼 지낸다.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아픔을 그렇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표현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삶을 아름답게 바라본다.

 아직 추수철도 아니라 별 일이 없는데도 부득불 조카는 일을 돕겠다고 밭으로 나선다. 여름내 알맹이만 쏙 빼내어 삶아먹고 쌓아놓은 옥수숫대가  남루한 가을처럼 작두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여름이 지나고 나서 우리 부부가 호흡 맞춰 해 내야  할 일이었다.

조카는 나중에 해도 된다는 남편을 설득해 작두 속에 옥수숫대를 디밀어 썰어내고 있다. 그 풍경이 그림처럼 아늑하다. 동생이 지고 있을 십자가와 아버지가 한으로 가슴에 안고 있었을 작두 무덤도 이젠 기억의 여백을 채우는 한 폭의 동양화 같았으면 좋겠다.



           출처: http://www.sd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