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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솔밭

7154 2007. 10. 3. 05:35

 

강솔밭

                                            우미정






   강둑에는 소나무 그늘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곳을 ‘강솔밭’이라 불렀다. 기 백년이라는 시간의 결을 버텨온 나무들의 그늘은 넓고 깊었으며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이 놀기에 좋았다. 그늘을 찾아 들어온 아이들은 그 곳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법을 익혔다. 아이들은 그늘 속에서 즐거웠다가 그곳을 벗어나면 다시 심심해지곤 했다. 

   마을에 크고 작은 사단이 생기면 사람들은 강솔밭으로 모여들었고 대부분은 그 곳에서 해결되었다. 그늘이 가장 깊어질 때는 삼동네 사람들이 모꼬지하여 노래 경합을 벌이던 즈음이었다. 나무들은 으레 제 몫인 양 ‘경로잔치’라는 현수막을 크게 걸고 제법 떨어져 있는 마을의 사람들까지 그늘 속으로 불러 들였다. 사물놀이패의 흥겨운 장단은 솔밭 그늘이 아니라면 그렇게 신바람 나게 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늘은 흥을 한 층 더 깊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숫기가 없어 늘 시르죽어 지내던 내 어깨도 그늘 속에선 분홍신을 신은 모양 절로 으쓱거려지고, 가르릉 거리며 연방 목울대를 오르내리는 천식에서도 벗어나는지 할머니는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꽹과리를 놓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키와 가지를 뻗댄 나무의 힘만은 아닐 것이었다.

   밤 마실 나온 청춘 남녀의 발소리를 숨겨 주는 것도 솔밭그늘이었다. 그런 밤에는 나무도 한 통속이 되는지 괜스레 가지를 흔들어 바람소리를 내곤 했다. 술버릇이 있던 큰 고모부가 술 한 잔 걸치고 처갓집을 찾았다가 할머니에게 따귀를 맞고 쫓겨나 소리 내어 엉엉 울며 억울한 마음을 덜어냈다던 곳도 솔밭 그늘이었고, 나는 사회초년생으로 동무는 새내기대학생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같이 앉아 함께 노래를 부르던 곳도 솔밭 그늘이었다.

   그늘은 강까지 닿아 있었다. 나룻배 한 척이 그늘 끝에서 겨르롭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그 곳의 물살은 해마다 여름이면 더 빨랐다. 그런 까닭에 ‘해수욕 금지’라는 팻말이 유독 붉고 크게 나붙곤 하던 곳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 청개구리라는 것을 소문내는 곳이기도 했다. 주근깨가 유난히도 많았던 낯선 얼굴의 아이를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허우적거리는 몸짓이 수상쩍어 던져준 튜브에 고마워하던 버성긴 인사치레 때문만은 아니다. 줄에 의지해 강을 건너던 나룻배처럼, 그 곳을 지날 때마다 그 시절의 풍경들이 그늘을 타고 나에게로 건너오는 까닭에서다.

   골목은 그늘을 벗어나 있었다. 골목은 어두웠지만 그늘과는 달랐다. 어둠은 모든 기억을 암담하게 채색한다. 일곱 살의 계집애가 숨을 죽이고 골목 어귀에 앉아있다. 아닌 밤중의 뜀박질로 인해 할머니의 천식은 더 헐떡거렸고 동생은 뒤뚱거렸다. 우리는 억병으로 취한 아버지를 피해 골목에 숨어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많이 아팠고 어머니는 많이 슬펐다.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고 할머니는 아버지를 측은하게 여겼다. 골목에 움츠리고 앉아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들만 초롱초롱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의 눈동자 같았다. 그 골목에서 나는 오래 서러웠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장마철 빗소리는 내 안에서 자라지 못하고 있는 계집애가 솔밭 그늘을 맨발로 뛰어다니는 소리 같다. 그 계집애가 ‘잘 지내고 있니? 한 번쯤은 이 곳을 다녀가렴’하고 솔밭 그늘에서 안부를 띄운다. 아이의 투정 같은 빗소리를 나는 아까부터 듣고 있다. 

   오랫동안 어두운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던 그 골목을 마음으로 찬찬히 더듬어 본다. 일곱 살이던 계집애는 어느새 서른일곱이 되었는데 꼽아본 아버지의 연치는 겨우 서른셋이다. 호랑이 같이 무섭기만 하던 아버지의 어깨를 물고 있는 삶의 송곳니들이 이제야 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돈, 명예, 건강 중에서도 건강을 잃으면 그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나 진배없다는데 젊은 나이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지냈으니 당신조차도 그 고통을 차마 다 헤아릴 수 없지 않았을까. 앞길을 막고 선 삶에게 떡을 주듯 건강한 육신을 하나씩 내어주고 젊음, 열정, 꿈 등 무형의 재산마저 다 내어준 뒤 아버지는 주름으로만 겨우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에움길 같았던 골목은 사라지고 솔밭 주위에는 소방도로가 생겼다. 삶으로 이르는 모든 길이 저렇게 뻥 뚫려 있기만 한다면야 가슴 칠 일은 하마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삶은 걷는 재미가 없다고 말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길은 민숭민숭 하기만 하다. 강솔밭도 언제부턴가 ‘강송정’이라는 이름으로 낯설다. 천방지축 뛰어 다니던 발에 짐짓 시비라도 걸 듯 툭툭 불거져 있던 나무의 뿌리들은 잔디에 묻혀 다소곳하고, 문패 같은 머릿돌이 솔밭 한 가운데 으스대며 폼 나게 서 있다. 그늘도 시절을 따라 풍화되어 가는 것인지 많이 인색해져있다. 어쩐 일인지 그것이 코흘리개 적부터 보아온 친구가 성형 수술한 얼굴인 것 마냥 어설프기만 해서 정이 영 덜 간다. 깊었던 그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제 그곳을 강솔밭이라 부르지 않고 강송정이라고 부른다. 

   내 기억 어드메쯤에도 강솔밭 같은 그늘을 두고 싶다. 표류하던 삶의 편린들은 그 속에서 추억으로 승화될 것이고 나는 흥에 겨울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이전의 내가 그리던 모습이 아니다. 이전의 내 모습 또한 내가 기억하고 싶은 모습들은 아니다. 내 기억의 대부분은 성숙되지 못한 채 단편의 삽화로만 그려질 뿐이다. 삶이 빚어내는 숙성된 그늘을 가지지 못한 이상 앞으로도 나는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