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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릴 수만 있어도 좋겠다

7154 2007. 10. 5. 02:59
 


너를 기다릴 수만 있어도 좋겠다

                  임은수



바닷가 모래밭이 조금씩 소금물에 젖어들 듯 내 마음은 오전 한 때를 빗속에 잠식당하고 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쳤지만 아직도 미진한지 하늘은 여전히 볼이 부은 아이처럼 뚱하다. 살짝 건드리기라도 하면 한바탕 또 퍼부을 기세다.

흐렸다 개었다 하는 날씨처럼 사람살이도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날의 연속이다. 내게도 샘물처럼 맑은 날이 있고 허드렛물처럼 던져버리고 싶은 날이 있다. 새 계절을 앞두고 내 안의 하늘도 누군가 손만 대면 왈칵 쏟아져 버릴 듯 잔뜩 어둡다. 언젠가 끄집어내야 할 것들을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다가 스멀스멀 목울대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처럼.


젊은 사람 하나가 세상에 남기 위해 고통스러운 씨름을 할 때, 그의 여자가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민들레가 항암 작용이 뛰어나대요. 어떤 사람도 민들레만 먹고 깨끗이 나았대요. 봄이 오면 우리 같이 시골로 가서 민들레만 캐어 먹어도 당신은 나을 수 있어요.”

의학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소생의 가능성이 희박한,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민들레가 마지막 희망이고 대안이었다. 약리적인 작용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희망이었던 것이다.

 병세가 악화되어 의식불명이 되자 그를 담당했던 의사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임종환자실로 옮기자고 했다. 며칠을 병실에서 함께 지새웠던 나는 가슴이 철렁하여 의사 손을 붙잡고 물었다.

“마지막 정신이 돌아왔을 때 옆에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해요?”

의사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잠시라도 깨어났을 때 옆에 아무도 없으면 얼마나 두렵고 서운할까 하는 생각에 끝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누나’인가보다고 수군댔다. 그의 아내가 내게“형님”이라 부르고, 그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시동생이었다.

내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시동생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을 때, 남편은 내게‘힘이 들겠지만’자기 동생에게 잘 해주길 당부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학교 다닐 때 고생을 많이 해서 늘 안쓰러웠다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일찌감치 7급 공무원으로 특채되었으니 그는 집안에서도 자랑거리였다. 그가 결혼해서 살림을 날 때까지 우리는 두 해가 넘도록 함께 살았다. 사는 동안 더러 불편한 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함께함으로써 쌓인 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다. 남편과 시동생은 친구처럼 주말이면 함께 탁구를 치거나 바둑을 두었다. 그가 있어 든든했는지 남편은 늘 활기 있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그가 참한 사람을 만나 결혼했을 때 우리 부부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네 사람의 나이가 서로 두세 살밖에 차이가 없던 우리는, 형제 사이였지만 때로는 친구 같이, 또 때로는 서로 의논의 상대가 되어주기도 하며 무슨 일이 있을 적마다 자주 만났다. 어린이 날이나 휴일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만나거나 서로의 집을 오가기도 했다. 가끔 시동생은 나중에 이층으로 집을 지어 아래층에는 우리가, 이층에는 자기들이 살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세상 잡은 손을 놓은 것은 부활절을 앞둔 4월 초 주말이었다. 늦추위로 강한 바람과 진눈깨비가 몹시 내리던 날, 그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 하나였다.

삼우제를 준비하기 위해 시장에 다녀오다가 길가 돌 틈에서 노란 민들레꽃이 한 송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두 다리에 힘이 주르륵 빠져 나갔다. 얼마나 허망하고 야속하던지. 그 때부터 화창한 봄의 상징인 민들레꽃을 보면 나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곤 한다.

하필이면 그 때, 남편은 해외 출장 중이어서 미처 연락이 안 되었는데 삼우제까지 마친 뒤에야 귀국했다. 사 년 여를 퇴근길에 동생이 있는 병원에 들러 와야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으로 알았던 남편의 상실감은 옆에서 바라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돌아온 남편은 말없이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방에 있던 딸이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아이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아빠가 내 침대에 엎드려 울고 계셔!”

살면서 가슴 한 켠을 도려내는 일이라면 피붙이를 잃는 때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관계가 살뜰했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시동생보다 이미 오 년 전에 하나밖에 없는 친정 오빠를, 그 또한 젊은 나이로 보내야 했던 나에게는 그 상처의 파동이 증폭되는 듯했다.

오빠 역시 마흔을 조금 비켜간 나이였으니 아내와 어린 두 아들, 그리고 혼자 계신 늙은 어머니를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안간힘으로 발버둥을 치며 눈을 감지 못하다가, 남은 사람들에 대한 염려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는, 힘들게, 힘들게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도 입모양을 보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그의 말을 읽을 수가 있었다. 마치 가슴에 와 꽂히듯 아주 선명하게.

‘어머니를 부탁해.

‘미안해.’ 

아마도 그것은 자기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한 말이겠지만, 내가 들을 때는 우리 형제들 전체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느 심리학자는‘상처란 영혼이 따귀를 맞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따귀가 아니라 몽둥이찜질로도 다스릴 수 없는 깊은 그리움으로 남는 일이기도 하다. 한 철 꽃잎이 지듯이 다녀간 향기도 짧기만 했던 오빠나 시동생이 단 한순간만이라도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면… 아아, 그렇게 그들을 기다릴 수만 있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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