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숩은 예쁜 낱말

수필이 잡문인가

7154 2007. 10. 24. 02:51
 

수필이 잡문인가.

  신익선/시인



나는 수필가는 잘 모른다. 근래 들어 그저 한두 분의 여류 수필가를 한번 뵈었을 뿐이다. 대신 어쩌다 만날지라도 시인들을 만나고 통화한다. 근황을 묻다 보면 요즘 내가 자주 쓰는 수필 얘기를 꺼내게 된다. 모 여류 시인이 수필 소릴 듣자 나를 향하여 대뜸 수필은 잡문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묻겠다. 대뜸 󰡐��수필을 잡문이다󰡑��라고 한다면 시는 그럼 안 잡문인가 말이다.

 발표된 시편들이 그냥 신변잡기 끄집어내 놓듯 개갈 안 나게 쓴 작품이면서도 수필은 대뜸 잡문이라 하며 경원시하는 걸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한다. 어떤 형식을 갖지 않고 닥치는 대로 쓰는 글이란 비난을 은연중 내쏘는 어투에 다시 묻겠다. 그럼 형식을 갖추고 심기일전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내놓으시는 선생의 시편들을 좀 함께 감상하고 평해보자고 말이다.

 만일 감상이란 단어가 손발을 지녔다면 뻔하다. 생쥐 콧김 정도도 안 되는 수준 미달의 시를 시랍시고 쓰는 필을 향하여 귀싸대기 백 대쯤 올려붙일 일이 뻔하다. 도대체 공부도 않고 생각도 않고 쓴 듯한 시편들을 쓰고, 그걸 또 묶어 책을 펴내면서도 의기양양하게 떠들어 대는 저 저급한 인식과 그 인식에 기초를 하여 수필을 잡문이라 비하해도 되는가 말이다.

 시는 고도의 언어의 조탁 기능이 우선시 되는 장르임이 틀림없다.

 한 편의 소설, 한 편의 수필을 축약시켜 놓은 것에 버금갈 만한 단문이 시라는 데에 동감하며 시가 모든 문학예술의 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한 편의 좋은 시를 만나면 삶이 보이고 영혼에 불길이 솟는다. 시를 사랑하고 시에 영성을 부여하는 걸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근래 시에의 새로운 모색을 도모 중에 있다. 모색은 창의와 상상력을 근간으로 하되 구체성과 예술성을 지닌 전체적으로 통일과 조화를 이룬 시편에의 새로운 창작을 말한다. 어설픈 논조나 주장이 아닌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갖춘 독특한 촉수와 독자적인 영토를 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되 시가 가상의 세계 위에 건립되는 미적 양식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중이다.

 즉 시란 어디까지나 사실을 굴절시켜 가상의 세계 및 현실을 빚어내는 프리즘이라는 것이 시에 관한 나의 관점이다. 다른 시인이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야 백인백색일 수 있어도 시는 문학 장르에서 고상한 미문이고 수필은 하찮은 잡문 정도라는 인식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논산에 사는 ‘이린’ 수필가가 갑신년 충남 문학 하반기호에 수필을 일러 말하길 시나 소설보다 낫다고 말한 것은 수필만이 갖는 장점을 발견한 말이다. 어지러운 삶이 잉태하고 있는 작은 기쁨들과 진지한 관조의 세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수필의 특성을 말해준 좋은 실례라 할 만하다. 복잡한 삶과 인생에 관한 다양한 면모와 특성을 간편하고 이해하기 쉽게 해부해 놓은 것이 수필이란 말도 공감한다.

 금아 피천득 선생은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자유로운 글이라 했는데 그러면서도 실은 주제와 소재, 구성과 문장이 유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져야만 하는 장르가 수필 문학이란 생각이다. 결코 쉽지 않은 글이고 허술히 볼 수 없는 분야임이 틀림없다.


 내 생각으로 괜찮은 수필이란 현상을 말하되 이면에 숨어 있어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명제가 붙어 있다. 즉 사물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을 살필 줄 알아야만 비로소 작품으로서의 수필에 근접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필을 구성하고 수필을 쓰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유독 시인들만이 시만 문학이고 수필은 문학이 아닌 잡문이란 말을 즐겨 쓰는지 모를 일이나, 분명한 것은 고달픈 생의 감동들이 시보다 수필 쪽에 많다는 점이다.

 정치 쪽으로 튀려다가 단념하고 글을 쓰는지 지렁이 소리까지 세밀히 풀어쓴 경력과 이력을 빡빡하게 써 놓은 문인들을 보면 거기서부터 식상한다. 웃기는 그런 얘기는 차치하고 문학은 언어로, 더 세밀히 단어로 이루어진 단어의 합성체다.

 가장 좋은 문학 작품이란 요란하게 이력을 떠벌리고 나팔 부는 게 아니라 가장 좋은 단어들을 가장 이상적으로 배합시켜 놓는 일이다. 그래서 글 쓰는 일을 작업이라 부르는 것이다. 정의가 어렵긴 하지만 고도의 정신적인 지식산업의 총화가 문학행위이다. 이 문학의 근간은 의미가 담겨 있는 감동을 방출해 내는 것이다. 더하여 궁극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영혼에 풍요를 선물하는 것이란 시각을 갖고 있다.

 여기에 삶에 있어 매우 긴요하고 더욱 간절하게 맨몸에 맨살로 부딪혀 오는 것이 수필이다.

 시가 미사여구나 난해한 해독 불가능의 몸짓으로 허공을 배회할 때 수필은 시궁창 곁에서 냄새 맡으며 살아가는 이 땅의 군상들을 조명한다. 마음의 눈으로 그들의 눈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미로에서 비단 안개 같은 그들과 나의 새로운 내일을 보게 한다. 그것이 수필이 주는 감동이자 가치이다.

 물론 어쩌다 한 편의 시에서 우주의 생성과 삶의 애환을 적절하게 묘사해 놓은 탄력 넘치는 생기를 목도하기도 한다. 단적으로 시가 좋다, 수필이 우위다 말 할 수도 없다. 요는 눈물이 아닌가 싶다.

 한 편의 예술작품에서 눈물을 쏟게 하였다면 그것은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드러냈다 할 만하다. 언젠가 내 여자 조카의 죽음을 한 편의 시로 썼을 때 그를 읽던 조카의 여동생이 눈물을 뚝뚝 떨어냈다. 물론 작품의 우열 이전에 특수 관계와 상황이 그런 파장을 불러왔겠지만 확실히 시는 일종의 감흥에 더 많은 하중이 실린다. 시의 장르가 뒤처져서가 아니라 단문의 특성상 완전 몰입의 여지가 요구되면서도 실은 어려운 탓이다.

 그러나 수필은 시의 분량에 수 곱이다.

 수필보다 더 긴 것은 소설이고 드라마다. 몰입의 시간이 길수록 눈물의 빈도는 상승될 것이다. 그것은 곧장 감동의 근사치에 접근시킨다. 감동의 문학이란 그리하여 감동의 경험을, 시보다는 소설, 소설보다는 드라마에서 더 리얼하게 전송받게 되는 것인데 그렇다 해도 수필의 가치는 축소되지 않는다.

 글을 써오면서 내가 느끼는 벽은 나를 비롯한 얼치기 문인들의 양산이다. 누구나 다 작가요 시인이라서 글쟁이 명함은 이제 폐지 속으로 처박아 버려야 할 정도다. 겸손히 배우고 공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주장의 관철의지가 강하고 독선적인 자기표현이 주를 이룬다. 문학을 경외하는 자세가 아니라 문학 외적인 것에 치중한다. 그리하여 대개의 문학단체는 지금 시장의 친목회만도 못하다. 친목도 아니요 문학이라는 이념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 얼치기들이 서로 엉켜서 고유한 인간 정신의 얼과 그를 빛내야 할 문학의 얼을 폄하 하면서 으스대고 있으니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타성에 젖어든 그런 이들이 큰 소리로 문학을 논한다. 이른바 폼도 똥 폼만 잡으면서 수필을 잡문이라며 폄하 한다. 그렇게 수필문학 자체를 폄하 하는 일은 난감하기만 하다. 허나 잘잘못을 따지고 무엇을 밝혀내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가급적이면 수필을 일러 잡문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하질 말았으면 한다. 하나의 소재를 형상화하여 하나의 의미를 탄생시키는 일이 잡문이라면 그 소릴 듣고 수필이 발끈한다면 어떡하겠는가.

수필이 핏대 올리며‘아무렇게나 그런 말을 하는 선생께서 쓰시는 글은 그럼 뭐냐. 개똥이냐 소똥이냐 피똥이냐 조지 새꺄.’하고 대들면 그땐 어떡할 거냐 말이다.

 

(출처: 신익선 산문집 ‘얼굴 없는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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