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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장인정신’ 아쉽다

7154 2008. 9. 1. 07:09

책 만드는 '장인정신’ 아쉽다

               -경향신문(2008,05)


존 뮤어(1838~1914)는 미국 국립공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환경주의자이자 자연주의 작가다. 지난주 나온 책 ‘나의 첫 여름’(사이언스북스)은 1869년 여름 요세미티 지역을 탐험한 경험을 기록한 책으로 미국 생태문학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작품이다.


호기심에 차서 책장을 넘겨보다가 의아스러운 대목이 눈에 띄었다. 옮긴이의 글에서다. 뮤어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를 요세미티로 초청해 이틀간 야영을 같이한 후 아이젠하워가 백악관으로 돌아가 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선포하게 한 사실은 매우 잘 알려진 일화”라고 썼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시기는 1953~61년. 뮤어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는 한 그를 만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출판사 측은 이 같은 내용을 그대로 담은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인터넷서점의 책 소개에도 버젓이 올라있다. 허술한 교정·교열 문제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지만 너무한다 싶었다. 게다가 상대는 국내 유수의 출판사인 민음사의 계열사 아닌가.


그런데 이런 일이 우연히 발생한, 예외적인 경우는 아닌 모양이다. 같은 주 나온 피터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한국경제신문). 몇 장 펼치지도 않았는데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나왔다. 이번에도 옮긴이 해설이다. “ ‘경제인의 종말’ 이후 드러커의 모든 저서들을 분석하고 예측한 것을 시간의 검증을 거쳐 ‘경제인의 종말’에서 다시 분석하고 예측하였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됐다. 그 앞 문장에 비슷한 문장이 있긴 했다. 담당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최종교정을 편집장이 봤다며 바꿔준다. 그의 대답이다. “이런, 실수했네요. 앞 문장을 잘못 반복한 것 같습니다.”


이름깨나 날린다는 출판사들이 이 모양이니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사실 요즘 출간되는 책들 가운데는 과연 교정·교열을 꼼꼼하게 봤나 싶을 정도로 오·탈자와 비문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오·탈자의 발견’은 책읽기의 일상적인 사건이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 도서평론가는 “이제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그냥 포기하고 읽는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한 출판인은 “아주 구조적인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출판사들이 ‘양’으로 승부를 내다보니 책을 ‘찍어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책에 대한 ‘장인정신’은 뒷전이라는 것이다. 교정·교열 능력을 제대로 갖춘 유능한 편집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지 못하는 출판계 시스템도 문제다. 요즘에는 교정·교열을 아예 외주로 돌리는 출판사도 많아서 편집자가 자신이 내놓는 책의 세부적인 내용을 모르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최근 문학과지성사가 내놓은 ‘한국문학선집 1900~2000’ 중 작가 김성동씨에 관한 해제에 심각한 오류가 발견된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혹 이 사건이 한국 출판이 자초할 위기를 경고하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 같은 게 아닐까. 화려한 장정과 디자인을 앞세운 한국 출판이 정작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다는.


출처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5021728495&code=90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