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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코 베이다

7154 2009. 2. 13. 14:50

눈 뜨고 코 베이다

      



 몇 주 전 토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혼자 밀린 일을 하고 있자니 책상 위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함께 다닌 J라는 여자 동창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삼십오 년여지 그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였으 나는 금방 기억해낼 수 있었다.

가끔 모이다 보면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한 친구뿐만 아니라 동창이라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초등학교만 함께 다닌 친구는 도통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남녀 사이라면 더욱 그런데 나를 기억해 전화를 걸어준 J가 고마웠다.

 J는 자그마한 용모, 하지만 당찬 구석이 있어 웅변을 제법 잘한 친구였다. 오랜 세월 서로 안부를 모른 채 살았어도 고향과 학교의 정서를 공유하는 자체로 우린 이제껏 만나 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구나 내가 사는 동네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남편이 공장을 운영한다는 그녀는, 그곳 사무실 일을 도와주려 매일 출근을 한단다. 예전에는 종종 동창 모임에 나갔는데 한동안 못 나갔다는 둥 가까이 살면서 못 만나 아쉽다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나는 그녀가 키가 좀 컸을까 하는 궁금증이 맴돌았으나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헌데, 동창은 마음마저 통하는 모양인지 자신이 먼저 키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키는 중학교 때 멈추어 나이가 오십이 되도록 몸만 불어난 채 아직 그대로 라는 것이다. 나 역시 키가 작았던 터라 우린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고향 특유의 다감한 목소리들이 휴대전화기로 한 오륙 분쯤 흘렀을까. 통화를 끝내야 할 분위기로 서서히 이어질 무렵, 그녀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하며 말끝을 흐렸다. 늘 애옥살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라,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하면 어쩌나 하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그녀의 말을 받았다.

 올해 서울 모 대학의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는 그녀의 딸은, 모 경제신문사의 취업 문을 어렵사리 뚫었단다. 그런데 신입사원에게 그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경제주간지의 정기구독자 모집 할당이 삼십여 건 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나에게 1년간 한 부만 구독해 달라는 청이었다. 다행히 부담이 작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흔쾌히 허락을 하였다. 물론 허락하기 전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다.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동창에게 그런 부탁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망설이며 자존심을 접었을 텐가. 사회 초년생이 구독판촉 한 건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딸을 대신해 그 부담스러운 짐을 짊어진 어미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되뇌며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었다. 통화를 끝낸 잠시 후 그 경제주간지에서 확인 전화가 걸려와, 자동이체 할 계좌번호와 주간지를 받아볼 주소를 건네며 구독 신청을 마쳤다.

 경제 주간지가 두 번째 배달이 된 뒤로 초등학교 모임이 있어서 인근의 동창 P와 함께 가던 날, 전철 안에서 그녀에게 슬쩍 J의 안부를 물었다. 오래전에는 동창 모임에 나왔는데 모습을 못 본 지 꽤 되었단다. 내가 J와 통화를 했다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당장 나오라고 하자며 내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으나 J는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도 묵묵부답이었다. J가 난처해질까 봐 정기구독까지는 입을 다물었긴 해도 괜히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어 자존심을 상하면 어쩌나 었다.

조용히 담소나 나누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을까. 나이와 시름을 모두 잊은 채 그저 웃고 떠드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멀리 떨어져 앉은 한 친구가 J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았다. J는 아마 여러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끝까지 모른 척 하려는데 함께 전철을 타고 온 P가 나와 통화를 한 사실을 알리자, J 이야기를 꺼낸 친구는 다짜고짜 나에게 경제주간지의 정기구독 여부를 물었다.

결론은, 동창 J를 사칭한 사기 전화였다. 나와 통화를 하던 여자가 동창이 아니라 사기꾼 여자였다니….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는 나를 보며 그녀는 얼마나 스릴을 느꼈을까. 모르긴 해도 ‘에라 이 병신’하며 한참 까르르 웃어댔을 일이다.

동창회를 다녀온 다음날, 자동이체를 취소하고자 은행을 가면서 그 사정을 아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창 여럿이 당했겠네?”

“응!”

‘젠장, 여럿 당하기는…. 당한 사람은 나 혼자던데. 그럴 줄 알았으면 전화라도 한 번 해볼걸.’ 동창 J로 속인 여자가 알려준 전화는 사무실이든 휴대전화든 불통인 것을 동창모임에서야 알았다. 그날 나를 바라보던 동창들의 시선이 아직도 따갑다.

 해당주간지 구독자 팀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이 이러하니 구독을 취소해달라고 하자, 취소는 해주는데 2만 2천 원을 내란다. 처음 주간지를 보낼 때 무슨 경제서적을 한 권 보내주더니 그 책값마저 물렸다. 강매를 당한 꼴이라 씁쓸한 마음이었으나 어수룩한 내 탓이라 돈을 보내고 군소리 없이 끝내버렸다. 꽤 이름 있는 신문사에서 어떻게 판촉사원을 채용하기에 그 모양인가. 경제신문사라면서 경제의 기본적인 철학도 없는 듯 보였다. 판촉사원이 정기구독자를 끌어오면, 한 구좌 당 일정한 수수료를 지급할 것이어서 분명히 그들은 판촉사원의 신원을 알 텐데 슬며시 묵인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이 보내준 단행본을 새삼 꺼내보았다. S대학과 유학을 마친 저자의 이력이 화려한데 책 제목이 무슨 무슨 비타민이다. 누가 먹어야 할, 어떻게 먹어야 할 비타민인지 모를 일이다. 두 번 다시 그 경제신문은 떠올리기가 싫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나는 ‘만일 그녀가 진짜 동창이면 어쩌지. 혹시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