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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노모, 혼자 미국 배낭여행 가다

7154 2010. 6. 11. 09:02

 

노모, 혼자 미국 배낭여행 가다



두어 달 전 혼자 유럽을 두루두루 다녀오신 어머니가 이번에는 미국을 다녀왔으면 하는 속내를 내비쳤다. 요즘 내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한참 머뭇거리다가 내일모레면 여든이신 노모가 또 언제 외국 여행을 해보실까 싶어 다녀오시라며 기꺼이 거들었다. 모르긴 해도 앞으로 호주며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와 남미 및 아프리카까지 다녀오실 기세이다. 늦바람이 참으로 무섭다. 고향이 제일인 양 하루가 멀다고 순천을 내려다니던 당신이 이게 무슨 변심이라는 말인가. 당신이 애써 지은 시골집의 시무룩한 표정이 꿈에서조차 비치는 요즘이다. 


돈이야 겁나도록 들지만 아직 당신의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여기저기 구경하실 수 있는 건강이 있으니 자식으로서는 그저 행복할 뿐이다. 다만, 자식이 진피아들처럼 못났어도 당신의 여생을 나와 좀 더 보내주면 좋으련만 한사코 여행하는데 시간을 보내시겠다니 서운한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하긴 지지리 못난 자식과 52년이나 사셨는데 무슨 미련이 있어 노후조차 내 씬더구를 보며 사실까. 어찌하면 불효를 만회해볼까 하는 얄팍한 내 꼼수인 것을.


어머니의 여행 짐을 간단히 꾸려 드렸다. 밖으로 나가면 우선 먹을거리가 우선이나 지금은 미국 어디를 가도 한국 음식이나 식료품이 있어서 딱히 챙겨 드릴 것은 없다. 그저 당신이 평소 집에서 쓰시던 화장품이나 염주 등 기도용품, 옷 몇 벌이면 넉넉하다. 대신 국제 신용카드 두어 장과 통역기 및 휴대용 내비게이션을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점검하였다. 이제 신용카드 한 장이면 세계 어디서나 모든 의식주와 교통 등, 해결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니 하늘나라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었다. 머잖아 하나님도 부처님도 이 땅에 내려와 사실 것이다.


몇 달 전 출시된 J사 통역기는 이전 타 회사 것보다 업그레이드 되어 노모가 이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5개 나라 말이 더 추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투짝만 한 본체는 물건가격 바코드 스캔도 할 수가 있다. 본체는 위 호주머니에 넣고 무선 이어폰은 보청기처럼 끼면 된다. 노모는 이미 유럽 여행 때 타 회사 통역기를 사용해보신 터라 내가 더 설명해 드릴 필요는 없다. 한 번 더 말씀드릴라치면 당신을 무시한다면 오히려 역정을 내실 것이다.


한국 사람들끼리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말하면, 통역기에서는 노모의 말을 통역하여 본체에서 스피커로 상대방에게 내보낸다. 또한 상대 외국인의 말도 통역기가 통역하여 이어폰으로 들여보낸다. 물건을 살 때도 본체로 바코드를 찍으면 역시 통역하여 이어폰으로 가격을 알려주는 것이다. 더구나 10개국 언어 통역이 가능해서 이제 굳이 영어를 할 이유도 없는 만세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 고향 내려가시듯 가볍게 인천국제공항으로 떠났다. 나는 어제 미리 어머니의 여행자 번호를 미국 여행국(局)에 입력을 해두었다. 어머니가 LA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의 이동 경로는 내 위치 추적 장치에서 계속 깜박거릴 것이다. 노모가 여행하시다가 길을 잃거나 다른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가만 기다리면 된다. 내가 노모의 위치를 알려주면 보험회사에서 달려나오듯 해당 지역 여행국 직원이 신속하게 출동하여 잘 안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5주의 입대 훈련을 마친 조카 찬오가 최종 자대로 가고자 훈련소를 떠나 연대에서 대기 중이다. 훈련 때는 인터넷으로 올리는 위문편지로 소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머무는 곳이 정확하였으나, 대기 중인 이때는 전화 통화 한 번 한 이후 더는 연락이 없어 답답하다. 최종 배치받은 자대라면 연락이 없어도 당연히 그곳에 있으려니 하겠으나, 지금은 대대로 갔는지 중대에서 머무는지 아니면 소대까지 들어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마치 공중으로 떠버리거나 행방불명이 된 듯한 기분이다. 기분이 막막하니 문득 녀석에게 위치 추적 장치라도 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 사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좀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중에야 왜 연락을 안 주었느냐며 빈말의 원망을 해오겠지만 다들 먹고 살기 바쁠 텐데 연로하신 노모가 당연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오히려 노모가 더 불편해하실 지도 모를 일이었다.


OO시험 1차 합격을 자주 방해한 영어는 나에게 이가 갈릴 정도였으니, 13년여 전 OO시험 준비를

그만둔 이래 그동안 영어와는 거의 담을 쌓았다. 어쩌다가 사무실에서 토익 단어를 카세트로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 테이프 하나를 다 못 들었다.


요 며칠 영어가 덧붙은 원고 하나가 머리를 쥐나게 한다. 이분은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아오신 터라 영어는 능통하시지만 우리 어법 구조는 거의 잃으신 듯하였다. 우리글을 읽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몰라 해당 영어 문장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우리 문장을 고쳐가는 것이다. 그런데 영문 원고를 다루다가, 포털 사이트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영어 발음까지 나온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고는 감탄을 하였다.


세상에! 이런 세상에 살면서 영어를 못한다면 말이 안 되는 소리이지 싶었다. 하지만 영어는 영어일 뿐 우리말이 아니라 불편하며 어렵다. 영어 안 해도 세상 구경 마음껏 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겠는가. 사실 노모의 여행 이야기는 거짓이다. 쥐가 나려는 머리를 식히려고 영어 한마디 못하는 노모가 외국 여행을 마음껏 하시는 상상을 해 본 것이다. 그쯤 되면 세계 공용어가 영어일 필요는 없겠지 한다. 아니 세계 공용어가 필요 없겠다.


*씬더구-낯짝의 전라도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