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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영, 그 쓸쓸한 뒷모습

7154 2010. 6. 14. 08:26

입영, 그 쓸쓸 뒷모습



2010년 4월 27일은 아침부터 오락가락 비가 내렸다. 찬결의 갈기를 세운 바람도 심술궂게 불어쌓았다. 변스러운 올해 봄 날씨는 기온도 차가운 데다, 흐리기 일쑤여서 온유한 햇살이며 설렘이나 희망 같은 봄날의 성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내 가슴을 얼리며 기다린 봄이거늘 쭈글쭈글한 날씨로 자주 짜증도 났다.

아침 7시쯤 찬오를 데리고 노모와 춘천 102보충대로 출발하였다. 우리는 청량리역에서 남춘천의 경춘선을 타야 한다. 남춘천역에서 다시 30번 버스를 타면 102보충대 앞을 지난다는 것이다.

일주일 전 쯤 순천에서 올라와 내 집에서 지냈던 찬오는 입대 전날인 어젯밤부터 슬슬 긴장한 티를 보였다. 본래는 지 아빠가 보충대까지 데려다 주거나, 아빠가 못가면 지 누나라도 데려다 주어야 하지만 지 아빠는 순천에서 출발해야 할 처지요, 직장 생활하는 지 누나를 딸려 보내기에는 아무래도 못 미더워 차라리 외삼촌인 내가 나서기로 하였는데 어머니도 한사코 동행을 하신 것이다. 설혹 지 누나와 나섰다 해도 녀석들의 그 아픈 태를 보느니 차라리 내가 나서는 편이 나았다.


아무리 가벼이 넘기려 해도 친엄마의 빈자리가 발길 채이듯 거리거리 걸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찬오는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었다. 이후 수원에서 순천으로 내려가 방학이나 휴가 때나 보았을 뿐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는데, 특히 이즈음 내 곁에서 머물다 보니 친엄마 없는 티가 가지가지 뚜렷하다. 아마 지 엄마가 있었더라면 하루에도 열두 번은 전화로 챙겼을 일이지만, 엄마 없는 적막함이 산속의 침묵처럼 깊었다. 광양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 누나는 서너 해 째 외할머니와 나와 함께 지내온 터이다.

우리 넷은 어제 삼겹살집에서 송별 만찬을 하였다.

찬오는 목덜미를 뒤덮었던 우북수북한 머리를 어제야 밀었다. 식탁에서조차 버티는 모자를 강제로 벗겨내자 주먹만 한 까까머리가 드러나는데 영락없는 중학생이다. 날마다 뭉그적거리더니 보는 이의 가슴이 다 시원하다.

외할머니와 가까이 붙여 사진 몇 컷을 찍자니 저들은 느끼지 못할 그림자가 그들의 어깨너머로 피뜩피뜩 비낀다. 연로한 외할머니랑 넷이서 노래방까지 다녀오기는 난생 처음이다. 녀석들이 음치는 아니었다. 두 해 있으면 여든인 노모의 목소리가 우리 귀청을 찢을 것 같았다.


자정이 넘어 노래방에서 나온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찬오는 노래방에서 나온 그 길로 나가서는 새벽녘에야 돌아왔단다.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가 밤새 어떠하였을지 생각하니 발칵 성이 솟았으나 어쩌랴, 잠이 안 올 것 같아 나갔다는데…. 긴장이 되어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못 일어나는 찬오를 깨우면서 어지간히 힘드셨던 모양이다. 가까스로 일어나면서도 연방 나를 찾더란다. 행여 저 혼자 보충대로 가야 하나 싶은 걱정 때문이었다. 겨우 아침 몇 술 뜬 채 집을 나서면서도 또 나를 찾았다니 녀석이 어드록 긴장하였는지 짐작이 갔다. 이런 녀석을 혼자 보냈더라면 어찌할 뻔 하였을까. 무엇을 묻던가, 무엇을 보채는 태가 앳되기만 한 녀석을 억지로 끌고 가는 기분이었다.


입대를 하는 녀석이면 가야할 보충대 위치며 차편 등을 미리 파악해두련만, 서울 지리도 모르는 주제가 오로지 입대한다는 생각만 있을 뿐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소집 통지서와 주민등록증이라도 챙긴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겉으로는 혼자 갈 수 있다는 녀석이었다. 동행해주겠다는 언약도 없었는데, 저 혼자 나에게 의지하였구나 싶어 또 가슴이 아팠다.

청량리역에서 열차를 타기 전 찬오는 5분마다 화장실을 드나드는가 하면, 껌을 사 연방 씹어댔다. 기차 안에서도 무망중에 두 다리를 떨다가 옆자리의 외할머니에게 핀잔을 들만큼 녀석의 긴장은 시시로 이어졌다. 내가 아무리 어깨를 감싸며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녀석이 이러다가 ‘나, 안가!’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조차 들었다.

나 역시 경춘선은 처음 타보는 열차였다. 열차 안에는 짧은 머리의 모자를 쓴 장정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귀걸이를 한 친구도 보이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 가운데 찬오가 가장 어리게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여자 친구와의 동행이었다. 다정하게 앉아 종종 서툰 키스를 나누며 가는 그들에게 정작 찬오는 눈길 한 번 안 주는데 내가 자주 흘끔거렸다. 우리 찬오도 저리 갔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시선이었다.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니는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이제껏 뭐했냐.’하자 씩 웃기만 녀석은, 전혀 청년 같은 느낌이 없다.


모르긴 해도 부모와 함께 간 장정들은 모두 승용차로 이동할 것이다. 날이 젖어 내내 흐릿한 날씨가 시간이 좀 지나

자 호랑이 장가가는 날처럼 햇살이 잠깐잠깐 쏟아졌다. 열차 안에서조차 여전히 찬오는 긴장된다며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비를 먹어 더욱 푸른 기색을 드러낸 잎사귀들을 보니 심란한 마음이 그나마 차분해졌다.

경춘선 차창에는 꼬리를 물듯 강가 정경이 이어졌다. 아랫녘을 향할 때마다 강이 스치면 눈을 떼지 못하던 나는 내내 엉덩이가 들썩인다. 바다나 강은 늘 정체불명의 유혹을 한다. 해읍스름한 강기슭을 망연히 바라보며 생각한다. 고요한 강가, 미루나무 아래 오두막 하나 지어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더 없으리라.

춘천 102보충대 앞에는 마치 5일장 같았다. 여기서도 세월은 무상하게 흘러와 있었다. 군화 깔창이며 시계며 전화카드며 요즘 신세대 군생활의 일단이 널브러져 있었다. 깔창이나 여타 신체 보호용품을 보니 ‘초등학생들도 국토횡단 체험을 하면 물집이 생기고 헐기도 하는데 하물며 군인이….’하는 생각이 스쳤다.

보충대 안에까지 가족이 들어와 입소식을 참관하는 자체도 1980년 군번에게는 놀라울 뿐이었다. 수많은 장정과 가족이 북적대는 보충대 앞에서야 찬오는 조금 긴장이 풀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점심을 가까스로 뜨거나 또 보충대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자격지심인가, 앞니 하나가 빠진 듯한 우리의 태는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한 보충대 안에서도 두드러졌다. 허리가 구부정한 채 의자에 걸터앉은 외할머니, 어찌 보면 아빠 같고 어찌 보면 아닌 듯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 그 주위를 서성대는 빼빼 찬오….


보충대 날씨는 그야말로 지랄버릇 같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가 또 잠깐 햇살이 나왔다가 하여 입소식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날씨조차 쌀쌀해서 찬오는 더욱 말이 없었다. 대대장 및 중대장 인사와 보충대 일정소개, 장병들의 각오와 큰절 인사, 부모와 친구들의 격려 등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이어지면서 드디어 찬오와도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오랫동안 등이라도 쓸어주면 좋을 것을, 외할머니와 나를 끌어안는 둥 마는 둥 한 녀석은, 모자를 벗어주고는 머리들이 새카만 무리 속으로 금세 사라져버렸다.

빗방울이 굵어져 허허로운 마음을 더욱 긁어댔다. 어머니는 버스 안에서 쉼 없이 훌쩍거렸다. 찬오 어미가 당신 곁을 홀연히 떠난 회한의 눈물일 것이다. 그제야 나도 국가에게 우리 찬오를 맡겼다는 생각이 들어 국가에게 아부하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찬오는 제 인생의 커다란 변곡점을 맞이하며 그처럼 입대를 하였다. 앞날의 목표를 투명하게 세우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물 흘리듯 귀한 시간을 써버린 녀석이다. 이제 22개월 동안 자유의 금단현상을 겪으며 몸과 마음을 다잡아 시간의 황금성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지켜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녀석에게 자주 편지를 쓸 요량이다. 제대할 무렵에는 지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반듯하게 세워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지 엄마도 그리 해주기를 나에게 간절히 바랄 것이다. 지가 얼마나 사랑했던 아이던가.

군 복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다.

나라도 나라지만 자신에게도 소중한 시간임을 일찍 깨우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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