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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과 회한

7154 2007. 10. 9. 10:29
 

흔적과 회한

      한판암





‘다친 자리’를 뜻하는 ‘상처’는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상해나 발병의 아픔을 견뎌내면 겉으로 ‘흔적’을 남긴다. 이에 비해서 형체가 없어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도 정신적인 고통이나 고뇌가 가슴에 고스란히 녹아내려 ‘회한’으로 똬리를 트는 경우가 ‘상처’의 또 다른 특징이 아닐까. 이런 성격의 ‘흔적’과 ‘회한’이 나와 얽히고설킨 사연들을 조심스레 들춰본다.

먼저 내가 경험했던 첫 번째 수술 ’뒤에 남은 자취나 자국’을 의미하는 ‘흔적’을 얘기한다. 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두 번의 사고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었다는데 다행히 어떤 ‘흔적’도 없다. 청장년 이후에 몇 차례나 병원과 질긴 인연을 맺었다. 그 첫 번째 관문에서 급성충수염(맹장염) 때문에 최초로 내 몸에 상처를 내는 수술로 영원한 ‘흔적’을 훈장처럼 새겼다. 한 번 경험을 하면서 이골이 났었던 것일까. 그 후에도 사고와 병마로 병원을 드나들며 크고 작은 상처에 따른 ‘흔적’을 남김으로써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체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흠집을 냈기에 불효를 저지른 셈이다.

나의 오른쪽 하복부(下腹部)에는 밖에서 안쪽을 향하여 비스듬하게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누운 듯한 모양의 충수염 수술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요즘은 매우 작게 절개하지만 사십 여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때문에 그 ‘흔적’이 징그러울 정도이다(절개된 길이가 9cm를 넘음). 하지만 이 상처의 ‘흔적’은 닳고 닳아 약아빠진 지금의 나와 다르게, 순수한 영혼이 정의를 외치던 젊은 날의 모습을 회상하며 되짚을 표상처럼 여겨져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대학에 갓 입학했던 해에는 데모로 5월에 조기방학을 했었다. 그렇게 신입생이 얼떨결에 맞았던 첫 번째 여름방학에 선배들을 따라 ‘충남 서산’의 바닷가 쪽으로 보름간의 농촌봉사활동을 떠났었다. 대략 일주일 정도 지났던 금요일 저녁식사 무렵에 갑자기 배가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고 급기야 인사불성이 되어 선배와 친구들이 들쳐업고 뛰며 택시를 불러 밤늦게 허름한 병원에 입원했다.

‘도립병원 서산분원’으로 당직 의사밖에 없어 응급조치를 받고 밤을 지샜다. 그렇게 토요일 아침을 맞았음에도 마취과 의사나 전공의가 없는데도 급성충수염이라는 이유로 서둘러 수술에 들어갔다. 서툰 마취로 수술 중간에 마취가 풀려 판자조각에 붕대를 감아 입에 물고 끙끙거리며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어설픈 수술을 했음에도 별 탈 없이 퇴원을 했고, 스무 날쯤 지난 8월초에 개학하여 1학기말고사를 치렀었다. 내 몸에 수술 자국을 남기는 역사적인 사건은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산부인과 의사에 의해서 이뤄졌고, 그 결과 낙인 같은 ‘흔적’이 생겼다.

나는 뛰어나거나 예리한 통찰력도 없는 처지에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우직하며 미련한 구석이 있다. 이런 이유로 지나간 내 자신의 처사가 마땅치 않고 미련이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뉘우치고 한탄함’을 뜻하는 ‘회한’은 현명하지 못함에서 잉태되는 원죄 같은 업보이다.

젊은 날의 나를 돌아본다. 이룸이나 얻음이 없었음에도 도전이라는 굴레에 매달려 여유 없는 생활로 일관했었다. 그런 때문에 아이들 문제는 거의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뜻을 펼치면서 바른길을 간다면 충분하다고 위안했던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다. 참으로 신기한 일은 아이들을 승용차로 등하교시키거나 붙들고 앉아 학습을 돕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위 동료들은 슬기롭게 잘도 했는데 말이다. 결국 자유방임은 자율을 바탕으로 하는 최상의 대응이 아니라 대책 없는 책임의 방기(放棄)라는 교훈을 얻었다.

고등학교 성적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느긋했었다. 하지만 미술을 하려던 큰아이가 원하는 길로 들어섰지만 벗어나기 어려운 멍에이며 숙명 같은 굴레가 되는 현실을 지켜봤었다. 작은 아이 또한 자기 수준에 맞춰 전공을 선택하고도 동화되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서성대며 빙빙 겉도는 나그네 같았다. 이렇게 극복하기 어려운 벽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면서 흔들리던 아이들이, 밖으로 눈을 돌리고 이국에서 나름대로 목표를 향하여 매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세상 이치를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현명했다면 나를 희생하더라도 그런 마음의 상처를 입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쓰디쓴 고통을 겪지 않게 바른길로 이끌며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뒤늦게 ‘회한’을 곱씹지 않아도 됐을법하다.

참담하고 쓰라린 경험이 자극제가 되어 결국 돌고 돌아서 자기 길을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새하얀 도화지를 생각한다.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잘못 되었으면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그림은 다시 그릴 수 있어도 아이들이 허송세월을 했던 지난날은, 오늘의 노력으로 보상된다는 어떤 확신도 없다. 이제 와서 아무리 절실하게 염원해도 아이들의 지난 세월은 되돌릴 수 없기에, 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가며 안겨주던 고통과 상처에서 녹아내린 앙금이 쌓여 생긴 ‘회한’이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염원하지만 그렇다고 살아가면서 상해나 병을 완벽하게 비껴가기 어렵다. 오늘날 육체의 상처(병)는 현대의학과 명의가 감쪽같이 원상회복하거나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면서 고쳐 놓는 세상이 되었다. 이에 비하여 마음의 상처를 씻은 듯이 치유하는 방법이나 길은 그리 쉽게 풀리거나 열리지 않을 것 같다. 거기다가 마음의 상처로 인해서 생겨난 심리적 고통이나 한(恨)이 켜켜이 쌓이면 또 다른 병을 유발한다. 결국 ‘회한’은 ‘흔적’ 이상으로 해로운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런 까닭에 생을 살아가면서 육체적 상처로 남는 ‘흔적’이나, 마음의 상처로 인해서 생기며 정신건강에 지극히 해로운 ‘회한’을 때로는 불가피한 공존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화해하며 다스리는 슬기로움을 깨우치는 도량이 필요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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