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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고춤추마

7154 2008. 2. 21. 12:57
지은이
출판사
해드림출판사
출간일
2007.12.2
장르
시/에세이/기행 베스트셀러보기
책 속으로
장은초 수필가가 해드림출판사를 통해 밑감이 고운 수필집 ‘발가벗고 춤추마’를 내놓았다. 수필가로 활동한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장은초 수필가의 첫 수필집이다. 장은초의 수필 한 편 한 편에는 ‘쌀쌀한 바람이 휘도는 초겨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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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감이 고운 수필

           이승훈/수필가




1. 들머리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수필가들이 오히려 수필을 문문하게 생각하는 의외의 경우를 본다. 이는 수필을 문학으로써 경시해서가 아니라 매너리즘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싶다. 이는 문(文)의 영역 확대로 수필적 상황이 느슨해져 긴장감이 떨어진 탓도 있을 것이고, 속도 지향의 디지털시대를 적응 해가면서 문학에서조차 엿보이는 우리의 심리적 단면일 수도 있다.

요즘 생활수필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일상을 소재로 가볍게 써내려간 글을 생활수필이라 일컫는 모양인데 심지어 신변잡기성이 농후한 글마저 수필이라는 미명을 붙여 문학화하려 한다. 문학성도 전혀 없는 글에 수필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좀 멋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수필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과 속도는 해조(諧調) 될 수 있을까. 다른 문학 장르도 마찬가지겠으나 무엇보다 삶을 관조하고 성찰할 수 있는 연륜과 여유가 필요한 수필은 속도가 개입하면 문학성의 부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초고속 인터넷이 우리 삶을 지배하다 보니 덩달아 수필가의 마음도 급해져 덜 숙성된 작품을 남에게 얼른 보이고 싶어 한다. 예전에야 발표의 장이 한정되어 그만큼 퇴고를 통한 숙성도 따랐으나 디지털문화의 습성으로 인해 갈수록 예술적으로 발전해야 할 수필이 오히려 유약해지면서 과거보다 문학성은 퇴보된 느낌마저 든다.

 이렇게 볼 때 장은초 수필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긴장하면서 수필을 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을 어려워할 줄 안다는 이야기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한발 비켜서서 차분하게 접근해가는, 수필가로서의 탄탄한 자세를 지닌 그녀다. 더 나아가 무엇이 수필인지 알고 쓴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말일지 모르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은 현실이다. 그녀의 작품 안에는 현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수필을 향한 그만의 장치가 있다. 그 장치가 수필의 생명일 수도 있고 문학성일 수도 있고 예술성일 수도 있다.

이번 작품집 「발가벗고 춤추마」에서 느껴지는 특장(特長)을 꼽으라면, 과거에서 반조(返照)된 맑은 서정과 강렬한 구심력 그리고 나름의 정신이 깃든 문체와 어휘 감각을 든다. 다만 우리는 아직 숙성 중임을 전제한다. 필자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두 작품을 중심으로 장은초 수필가의 수필세계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



2. 동(童)수필의 情操


「발가벗고 춤추마」는 전체 여섯 부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첫 작품집이 그렇듯 저자 역시 크게 과거와 현재의 삶을 불러내 작품을 그려내는데, 여기에는 장은초 수필가만의 두드러진 심상 풍경이 있다. 겨울 하늘의 홀로 떨어진 별처럼 애잔하게 나타나는 과거의 서정과 가벼운 탄성을 자아낼 만큼 환하게 다가오는 현재의 서정이 그것이다. 부언하자면, 과거와 현재를 반추하며 대충 끄집어내 직조한 것이 아니라 옥의 옥을 가리듯 자신만의 색깔을 낼 수 있는 소재를 조탁함으로써 다른 작품집에서 흔히 체험할 수 없는 심상 풍경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발가벗고 춤추마」의 전반부, 특히 ‘소녀시대’에 수록된 작품을 읽다 보면 저자의 까만 눈망울이 떠오른다. 마치 여기 작품들은 소녀의 티 없는 눈망울을 연상시키는 동수필 같기 때문이다.

중년이 흐른 뒤 별 헤던 유년을 어제 일처럼 묘사하기란 그만그만한 필력으론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유년의 해맑은 심성을 이입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아동문학을 처음부터 겸해 왔다면 모를까 수필만 고집해 온 저자를 생각한다면 작품 안에서 까만 눈동자 같은 심성을 아니 떠올릴 수 없다. 은애가 남다른 부모 아래서 싹 틔워 온 어릴 적 사랑과 영혼이 그녀의 문학적 역량을 매체로 젖어든 작품들인 것이다. 따라서 과거를 과거답게 그려냄으로써 독자의 심상 또한 그 시간과 공간으로 자연스레 접목하게 된다.


「……어머니가 외가로 떠난 뒤 아버지는 조물조물 미역을 빨고 울타리에 걸쳐있는 오이 하나를 따서 오이냉국을 만드셨다. 꽃분홍 접시꽃이 토담 밑에 병풍처럼 드리워져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감나무 그늘 밑에 누워 긴 혀를 내빼고 헉헉거리는 백구의 모습도, 내 눈에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일상일 뿐 어머니의 슬픔과는 아랑곳없었다. 뒤란 우물가에는 개구리참외 서너 개가 동동 떠있고 비단개구리가 쉴 새 없이 폴짝거리던 그 여름날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은 건 점심을 먹은 후였다.……」-‘ 그 여름날의 애상(哀想)’ 중에서


이 작품의 주 소재는 오보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이다. ‘날벼락’ 같은 이 소식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저자는 얄밉도록 차분하게 여름날의 정경을 묘사한다. 그리고 권위로 똘똘 뭉친 중년 세대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아버지의 이채로운 모습을 내세워 평화로운 순간을 더욱 평화롭게 이끈다.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 문단 전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으나 리드미컬한 작품 구성을 위해 저자가 반전을 위한 호흡조절 공간으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하나 더 돋보이는 것은 감정의 절제이다. 대체로 한 공간을 도려낸 서경은 저자의 감성이 지나쳐 자칫 늘어지기 십상인데 여기서는 ‘아랑곳없는 어머니의 슬픔’과 ‘날벼락 같은 소식’으로 선을 그어 그 서경의 여운을 독자 몫으로 돌린다.

이 문단과 해조 된 다음 문단도 특별히 짚어볼 만하다.


「……풋나무서리에서 베어 온 생초더미의 연기는 밤새 마당을 지키다, 이른 아침 토담 위에서 샛노란 웃음을 보내는 호박꽃의 인사를 받으며 손을 나누곤 했다. 그러나 내 눈물과 그리움과 쓸쓸함을 싣고 간 별똥별은 늘 가뭇없을 뿐, 좀처럼 어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름이 온전히 물러간 뒤에야 하얀 얼굴로 돌아오셨다.……」


수필은 문학이요, 문학은 예술이다.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야 등단하자마자 써내는 결결이 예술성을 지닌 수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평생 수필이라고 써서 발표를 하지만 엄격히 털어보면 예술성을 지닌 수필은 단 한 편도 없을 수 있다. 가치판단은 상대적이므로 고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필에는 수필로써 명예를 부여할만한 예술성이 존재해야 한다. 설령, 상상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따뜻한 방에서 배를 깔고 술술 풀어낸다고 하더라도 이를 수필로 승화(예술성 부여)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신적 질곡이 배어야 문학성의 흔적이나마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예술성 즉, 문학성을 일러 ‘언어를 매체로 한 미적 창조와 미적 표현 행위’라고 했을 때, 이미지의 형상화 같은 미적 창조나 미적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 문단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고감도의 서정이다. 애틋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미적 정조(情操)가 숨죽이게 한다.  따라서 이 문단 자체로도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얼개를 보더라도 위 두 문단은 과거와 현재의 일체감을 유지시켜 작품이 강한 구심력을 갖게 한다.   또한 ‘애상(哀想)’이라는 소재를 날것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이 작품에서처럼 고운 서정을 밑감으로 댐으로써 더욱 ‘애상(哀想)’적이게 해 결국 작품의 격을 높이는 기법이 장은초 수필가의 이번 작품집 곳곳에서 비친다.

저자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동도의 길을 가는 처지인데, 기념비적인 첫 작품집에 필자의 부족한 글이 붙어 격을 떨어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저자의 작품 한 편을 행간에 내재한 의도까지 분석하며 작품평을 쓴다면 어느 작품이든 충분한 원고를 내놓을 수 있겠으나, 제한된 공간에서 작품마다 조금씩 언급해가며 훑어가기에는 내 필력이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밑감 고운 저자의 작품들을 오히려 흠집 내거나 전체를 산만하게 할 공산이 크다. 다만‘가을 작달비’, ‘선물, 그 찔레꽃 향기’, ‘가을날 오후에 비친 부정’ 등 처럼 작품 안에서 통성(痛聲)이 들리는,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저자의 통성을 독자들은 이미 작품 곳곳에서 들었으리라고 본다.



3. 작품의 구심력


대체로 수필 한 편은 원고 15매 내외 분량을 든다. 각종 신춘문예에서 제시하는 분량이기도 하다. 문학이 분량으로 묶인다는 것은 어설프긴 하지만 가뜩이나 수필의 문학적 지위가 허약한 터에 이런 형식적인 부분부터 탄탄하게 지탱할 필요가 있다. 수필 한 편의 분량은 디지털 문화에 젖은 독자들에게는 길게 느껴질 수가 있다. 물론 독자를 의식해 수필을 창작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독자가 없는 문학은 공소(空疎)한 일이다. 따라서 소설처럼 아예 긴 호흡을 작심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필은 첫 문단부터 흡입력을 갖지 않으면 독자는 금세 마음을 놓아버리게 된다.

장은초 수필가의 작품들은 작품의 구심력이 뛰어나다. 그런데 이 구심력의 형태는 첫 문장을 시작하자마자 힘을 발휘하기보다는 깔때기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차츰차츰 독자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힘으로 나타난다. 이는 전체적 특장이므로 어느 한 작품을 꼬집어 예로 내세우기가 어렵지만, 이번 작품집 제목을 추출하게 된 ‘발가벗고 춤추마’에서 이 구심력을 살펴본다.

우선 이 작품은 중고등학생의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자녀와의 성적갈등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이다. 그러나 저자는 평범한 소재를 선택했을 때 작품을 어떻게 이끌고 가야 수필로써 탄력이 붙는지를 알고 있다. 일상적인 소재일수록 문장이 늘어질 수 있는데, 저자는 처음부터 췌사(贅辭)없는 문장으로 가독률(可讀率)을 높여간다. 또한 두 주체의 충돌이 일방적으로 흘러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서로 머리싸움 하듯 이어지는 구조가 무엇보다 흥미롭다. 여기에 ‘한 꼬투리 속에 든 콩도 더 실한 게 있고 덜 실한 게 있듯이,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태(胎)가 같다고 일매지리라는 생각은 나만의 욕심이란 걸 알았다.’와 ‘작은애가 100점 받는 것보다, 없는 손자 환갑 지내 먹거나 솔 심어 정자 만드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나는 그 기대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와 같은 수사법이 구심력에 힘을 실어준다.


「……녀석이 제 깐엔 기본 용돈에다 약속을 못 지킨 범칙금이란 명목으로 용돈을 두 배로 받아내기 위한 포석일 것이다. 그걸 모르지 않는 내가, 제아무리 지싯거린들 만만쟁이 노릇만 할까. 녀석이 아직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제 어미가 구미호보다 더한 ‘매구’라는 사실을.

 필히 발가벗고 춤춰야 한다면, 그 장소는 노량진역이 아니라 저 학교인 국사봉중학교 운동장이 될 거라고 더 큰 엄포를 놓아야겠다. 좀 치사스럽더라도 뒷갈망은 하고 봐야겠기에.……」


작품의 절반을 넘어오면 이미 독자는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지방의 고다이버’ 예화 역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이의 대응도 만만치 않으나 위의 예시처럼 저자의 마지막 반전 묘사가 독자에게 넘치도록 감응을 준다. 이처럼 작품의 구심력이 살아 움직여야 일반 독자들에게 수필의 부접(附接)성을 더해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한 가정의 따스한 정서와 같은 메시지는 제쳐 둔다 하더라도 이쯤 되면 저자 스스로 수필에 대해 현능(衒能)할만하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참 수필 잘 쓴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일까.



4. 윤슬처럼 빛나는 어휘 구사력


 장은초 수필가의 이번 작품집에서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다.

문체를 구성하는 어휘를 선택함에 있어서 필자는 순 우리 어휘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우리 어휘를 더 귀하게 여길 뿐, 문학이라는 테두리에서 표현의 영역이 넓거나 넓은 표현의 영역을 함축해주거나 운율적인 한문 어휘가 있다면 굳이 이를 배척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자고로 문인은 ‘우리’글 자체를 매개로 행복과 사랑과 명예와 재산을 얻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문인은 ‘우리글’이 주는 수혜의 폭이 넓은 사람들이다. 문인은 따라서 우리글을 보호양육 할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 알천 같은 우리 어휘가 건강을 잃고 시들어 있는데 이를 모른 체한다면 문인으로서 얀정머리 없는 짓이다. 문인은 우리가 찾아내고 돌보지 않아서 유기되고 파괴된 우리 언어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고 건강하게 세워야 하는 언어의 치유사이기도 하다.

평범한 어휘로 얼마든지 문학성을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은 틀림없는 말이다. 반면 ‘대한민국 문인’이라면 현재 유기된 언어를 살려 쓴다고 시비할 일도 아니다. 생소하다는 이유로 곧장 ‘어려운 어휘’로 치부하면 우리는 문학적인 어휘를 놓칠 수 있다. 글을 읽다가 생소한 어휘가 튀어나오면 이를 눈치 주거나 사전을 찾아보기 귀찮아 대충 넘겨버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사전을 찾아 지적 욕구를 해소하는 자세가 글을 쓰는 우리에게는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언어의 표현으로 예술성을 나타내는 문인이 스스로 어휘 감각을 둔화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일상적인 어휘의 매너리즘도 벗어나야 한다. 신선한 공기를 유입하듯 너무 자주 사용해서 물린 어휘를 대체할 새로운 어휘를 찾고 연구하는 자세가 우리에게는 더 필요하다. 이런 입장은 장은초 수필가의 이번 작품집 「발가벗고 춤추마」에서 윤슬처럼 빛나며 산견(散見)되는 어휘들에 대한 다름 아닌 필자의 시각이다.

 


5. 메지 내기


장은초 수필가의 이번 작품집에서 저자만의 색조를 추출해가며 감상하자면 원고 1백매로도 부족하지 싶다. 따라서 여기 든 작품 예시는 전체의 가늠자로 보았으면 한다. 장은초의 수필 한 편 한 편에는 ‘쌀쌀한 바람이 휘도는 초겨울 아침에 창가로 환하게 내려앉은 햇살’ 같은 대상과의 밀감(密感)이 흐른다. 수필의 자기고백적 성격이 없으면 얻을 수 없는 감동과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이한(離恨)과 상목(傷目)의 심상 풍경들이 제시하는 메시지는 이 시대의 메마른 가슴들을 적이 적셔줄 것이라고 믿는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지만 작품을 가만 들여다보면 평소 그녀가 남편과 두 아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유를 알게도 한다.

수필을 제대로 알고 수필가의 길을 성실하게 걷고 있는 장은초 수필가, 그녀의 첫 작품집 「발가벗고 춤추마」의 출간을 두 손 모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