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록어미의 금연 에세이
-잇몸이 녹아내린 세월
온몸의 뼈가 뒤틀린다는 해산의 고통처럼 어떤 이유로든 몸을 한 번 된통 앓고 나면 몸이 재정리가 되는 듯하다. 기(氣)의 순환이 밑바닥에서부터 뒤집혀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로 자리 잡는 데는 당연히 섭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마치 수자원을 확보하고 대기 순환을 개선하며 해양의 적조 발생을 억제하는 태풍의 순기능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적 질병 가운데 해산에 견주는 고통이라면 신장 또는 요로결석 그리고 치통일 것이다. 이 둘 다 술․담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질병이다.
수십 년 피워온 담배를 끊었을 때도 금단현상의 초기 발작이 지나면 제2기 금단현상으로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어깃장을 부리면서 새로 판을 짜 들어앉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골이 저리도록 앓았던 기억은 딱 세 번이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더위 병을 앓던 나는 쑥즙이 좋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쑥을 뜯어 즙을 내어 먹다가 오장육부가 뒤틀려 죽을 뻔하였던 그 더위 병을 겪었다. 그리고 두어 해 전 성모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그 응급실에서 퇴원하였던 몸살 그리고 다음이 치통이다. 금연에서 오는 욕구 억제 자체가 스트레스다 보니 종종 치통을 앓아오지만 약을 먹으면 가라앉는 정도이지 눈알이 뒤집힐 정도의 통증은 아니었다. 태풍 같은 치통, 그 두 번의 이야기다.
잇몸이 녹아내린 세월1)
치아의 건강을 오복(五福) 가운데 하나로 잘못 아는 사람이 있다. 다섯 가지의 복은 壽(수), 富(부), 康寧(강녕), 攸好德(유호덕), 考
終命(고종명)이라는데 이는 오래 사는 것, 부유하게 사는 것, 우환 없이 편안한 것, 덕을 좋아하며 덕을 행하려는 것, 천명을 다하는 것을 이른단다. 지천명인 우리 세대 여자들 가운데는 오복이란 이름이 더러 있었다. 사춘기 때의‘오복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며 애먼 부모님을 원망하였지만 이제 와 오복의 뜻을 음미해 보면 참 기막힌 이름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름이지 싶다.
근데 왜 치아의 건강이 오복 중의 하나라고 알려졌을까?
가장 큰 이유는 어느 치약회사의 광고 때문인 듯하다. 지금도 시판되는지 모르겠으나 예전에 ‘오복치약’이 있었다. 다섯 가지 약제를 썼다는 그 치약 이름을 오복이라 불렀는데, 오복과 치아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탓인지 이때부터 치아의 건강이 오복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한다. 치아가 건강해서 음식을 오래오래 잘 씹어 삼키면 건강하고 장수할 테니 이를 오복 중의 하나라 해도 크게 벗어난 말은 아니다. 사실 치통을 앓아보면 치아의 건강은 오복이 아니라 삼복 가운데 하나로 삼아도 된다.
얼마 전부터 야금야금 치통이 왔다. 볼이 약간 부었어도 통증이 가벼워 그냥 넘겼다. 통증이 있을 때마다 진통제를 몇 번 복용하는데 그친 것이다. 미진한 통증이 시리듯 느껴졌지만 이러다 낫겠지 하며 지나쳤다. 잇몸약을 사놓고도 한두 번 복용한 채 밀쳐두었다. 치통이 심하면 미친 개 날뛰듯 한다는 말이 있다. 얼마나 아프면 그리 표현하였을까마는 지금껏 이가 아파서 약을 복용해 본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흘려버릴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부터 다시 어금니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느낀 일이지만 이 미진한 통증은 영락없이 산모의 초기 진통과 같았을 것이다. 잠자리에 들자 통증이 급물살을 탔다. 잠이라는 놈은 아예 접근할 엄두를 못 냈다. 옆으로 돌아누우면 줄줄 흘러내리는 침이 베개를 흥건히 적셨다. 이리 대굴 저리 대굴 하다가, 앉았다 일어섰다 하기를 반복하였다. 아이들이라면 발을 동동 구르며 울기라도 할 텐데 어른 체면에 엉엉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으으윽’ 신음을 연방 터트릴 뿐이다. 나는 슬슬 미쳐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발광이 시작된 것이다. 두 알씩 먹는 잇몸 약을 진통제 대신 한 번에 네 알을 먹었으나 오히려 통증은 비웃기라도 하듯 더 요동을 쳤다. 치통 때문인지 갑자기 왼쪽 종아리에 쥐가 났다. 종아리가 뻣뻣하게 굳어지면서 살이 찢어질 듯하여 비명을 질러댔다.
두서너 시간을 가까스로 버텼다. 이러다간 새벽일을 망칠까 싶어 잠자기를 포기한 채 잇몸 약 두 알을 더 먹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행여 문을 열어 둔 약국이나 개인병원의 응급실이라도 발견하면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할 판이었다. 초저녁부터 비가 내린 탓인지 기온조차 으슬으슬 하는데, 볼이 부어오른 채 혀가 얼얼하면서 오한이 들었다. 거기다가 오른쪽 얼굴로 통증이 뻗쳐 눈이 침침해지고 편두통이 일었다. 얼굴이 마비가 될 지경이었다. 불거진 볼을 손으로 감싸거나 아픈 이를 만져 보기도 한다. 손으로 비틀어 당장 뽑아버리면 통증이 멈출 것도 같았다. 통증을 잊고자 보고 싶은 사람이나 걱정스러운 일을 떠올려도 소용이 없다. 그러면서도 집집이 새벽 배달을 이어갔다.
외로움이 짓눌러 왔다. 아파 죽겠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도 새벽일을 하는 그 시각 누가 있으랴. 숨을 멈추었다가 ‘으윽’ 신음 토하기를 반복하며 다시 두어 시간 어두운 골목을 뛰어다녔다.
약국도 응급실도 당연히 없었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 종합병원을 찾아갈까 하다가 평소 생수를 사곤 하던 편의점 생각이 났다. 진통제와 같은 상비약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한참 졸던 아저씨를 깨우고는 혹 진통제 있느냐고 물었다. 진통제가 있었는데 다 나갔다며 말을 흐리던 아저씨가 왜 그러느냐 되묻는다. 이가 아파서 그렇다 하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두 개 남은 조제약 봉지 중 하나를 떼어줬다. 자기도 이가 아파 병원에 들렀다가 처방을 받아온 약이란다.
새벽 4시,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약만 보아도 살 것 같았다. 어찌나 아프든지 한 봉지 먹어서는 통증이 안 멈출 것 같아 두 개 다 주기를 바랐으나 지금 이 한 봉지가 어디인가. 나는 약을 건네받자마자 단숨에 털어 넣었다.
약을 먹으면 바로 뚝 떨어질 줄 알았던 통증은 30분쯤 지나서야 서서히 숨 죽어 갔다.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를 내어 둔 어느 가게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입안이 바싹 타 들어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었으나 약효가 줄어들까 두려워 사이다를 자판기에서 뽑았다. 여섯 시간의 난산 끝에 통증이라는 놈은 치아에서 빠져나왔다. 구름 낀 하늘의 부스스한 달이 해산어미처럼 보였다. 하필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옆 가게가 뼈다귀 해장국 집이다.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개 한 마리가 휴지통을 뒤지더니, 차가운 아스팔트에 엎드려 우두둑 우두둑 뼈를 씹는다. 참 위대한 복이다, 치아가 건강하다는 것은.(2002.11.21)
연재 출처: http://cafe.daum.net/w12836
http://blog.naver.com/toqur59/5008932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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