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시력을 잃은 꼬실이(5)

7154 2011. 1. 31. 16:39

 

 

 

 

 

시력을 잃은 꼬실이(5)

 

 




개에게는 책이 없을까. 열일곱 해를 살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 우리보다 낮은 키로 보았던 그 나지막한 시야는 또 다른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은 자기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아닐까. 그렇게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고서 보이지 않는 눈을 동글게 뜨고 오래 앉아 있는 건 나이 든 목숨만이 할 수 있는 진득함이라고 깨닫는다. 그 작은 책을 읽고 싶다. 거기에 나에 대해 무어라 썼는지 궁금하다. 너는 행복했니.

 


“거기서 뭐 해. 어디 간 줄 알고 놀랐잖아.”

더 기다리지 못하고 녀석을 쓸어안으니까 다소곳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기분 좋다는 듯이 비벼댔다. 토닥토닥 엉덩짝 두들기다 많이 야위었구나 느꼈다. 저울에 세워 몸무게 달아보면 그다지 줄지는 않았지만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고는 걷거나 뛰는 일이 없자 근육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모양으로, 다리도 가늘어지고 엉덩이뼈도 도드라졌다. 그렇게 아름답던 금색 흑색 털도 뿌옇게 윤기를 잃었고 숱이 많이 성겨져 훤히 들여다보이는 살갗이 허옇게 건조하다. 가끔 커다란 왕비듬을 집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보습제를 뿌려준다. 냄새 좋다고 그 털에 얼굴을 박고 킁킁 과장되게 냄새를 맡는다. 어쩌면 녀석에게서 나는 늙은 냄새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녀석도 아버지처럼 앓는 일 없이 그냥 조금씩 기운을 잃어가고 있다. 고통스럽지 않게 자는 듯이 그렇게 떠날 것 같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오늘 밤 자다가 훌쩍 다리를 건널 수도 있겠다. 땅에다 묻고 싶지 않다. 멧돼지며 고라니며 튀어나오는 산 아래 살지만 그 산이 뎅겅 허리를 잘려 거기에 하얀 길이 났다. 만약 산에 묻으면 언제 어느 때 파헤쳐질지 불안하리라. 내가 사랑한 내 개가 흔적도 없이 갈가리 찢겨 흩어질 상상만으로도 덜덜 떨린다. 그래서 화장을 하겠다고 진작 마음에 정했다. 오늘 문득 머지않았을 거라는 걸 깨닫고 마음이 급해졌다. 개를 화장해 주는 곳이 어디더라. 웹 검색으로 몇 군데 찾은 끝에 그 가운데 비교적 가까워 찾아가기 쉬운 곳을 골라 가는 길 지도를 인쇄했다. 착착 곱게 접어 언제라도 꺼내기 쉽도록 지갑에 넣고는, 단꿈을 꾸는지 입맛을 다시는 녀석을 내려다보는데 눈물이 났다.

“미안해, 벌써 이런 거 준비하는 게 너를 서둘러 보내려는 거 아닌 거 알지?”

절마당에서 불꽃 속에 타들어가던 아버지 영정사진이 보인다.

 


- 김은미 반려견 에세이집 「꼬실이」(해드림) 중에서

http://www.yes24.com/24/goods/4521672?scode=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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