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닌토 음악과 함께하는 가족별곡(17)
죽음을 앞둔 환자가 모인 호스피스 병실이었다. 모르핀으로 통증을 다스리기 시작한 말기 암 환자는 대부분 형처럼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당시 호스피스 병실에는 여섯 살 아이부터 여든 노인까지 입원해 있었다. 환자들은 겨끔내기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한바탕 난리를 치고는 하였다. 불안과 슬픔이 뒤범벅된 병실은 매일 고통을 안추르는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 찼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환자의 가족들은 서로 손을 잡아주며 위로의 눈물을 지었다. 형은 이곳에서 석 달 동안 마지막 고통을 모질게 겪은 것이다.
형과 나는 다섯 살 차이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형은 어려운 우리 집의 가장이었다. 학업의 꿈을 접지 못 한 내가 뒤늦게 대학을 들어가거나 졸업 후 수년 동안 사법시험을 준비한 일도 맞벌이 봉급생활을 하면서 묵묵히 뒷바라지해 준 형 덕분이었다. 불같은 성격과는 달리 슬픈 드라마를 보면 곧잘 울던 형은, 한편으론 나와 가장 마음이 맞는 친구이기도 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우린 토를 달지 않았다. 형이 무엇을 시키든 나는 거역할 줄 몰랐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형은 무엇이든 성심껏 해주었다. 살아가는 일이 힘들 때마다 우리는 맨 먼저 중정(中情)을 털어놓으며 상의하는 사이로, 형에게 부담을 주어 늘 미안해하는 나와 내 호주머니를 좀 더 풍요롭게 채워주지 못해 매번 미안해하는 형이었다.
내어줄 것 모두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형이 뇌종양 말기로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차마 이 사실을 형에게 전할 노릇은 아니었다.
형이 나에게 힘없이 물었다.
“내가 어디가 안 좋다니?”
“응, 머리에 물혹이 생겼는데 수술하면 괜찮대.”
평소 무조건 나를 믿는 형이지만 내 눈빛에서 사실을 거니챌까 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와 어린 두 딸 그리고 곡진하게 모신 어머니와 든든히 의지해온 동생들…. 하루하루 죽음의 그림자를 꺼당기며 그런 우리를 바라보아야 할 형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못 견디게 가여웠다. 몸도 마음도 허정허정 풀려 사실을 알려줄 용기마저 낼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절망하는 형을 보기가 두려웠을지 모른다.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암만해도 사랑하는 가족과 날마다 사별 연습을 해야 하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할 형이었다. 나는 눈만 뜨면 어찌할 바를 몰라 집에서나 병원 화장실에서나 택시 안에서나 눈물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흙내가 고소한 시간의 나날이었다. 수술을 하면 좀 더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데 형은 그마저 거부할지 모른다는 염려도 들었다. 생각건대 어느 한쪽의 애간장만 태우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분간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가족들과 입을 맞추었다.
-이승훈 에세이집 「가족별곡」(해드림출판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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