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실이(50)_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다
(너도 내게 온 귀한 생명이었다. 무딘 그대에게 호소하고 싶은, 그대로 묻어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간과 반려견의 이상적 교감 이야기.)
밤새 막둥이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잤다. 아니 자는 척했다. 딸도 역시 손을 올려놓고 자다 깨다 했다. 그 작은 몸뚱이를 우리 두 사람 손이 이불 대신 덮고 밤을 지낸 셈이다.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작년부터 살짝 부정맥이 있었는데 지금은 심장이 아주 규칙적으로 아름답게 뛴다는 것이다. 수의사님이 그랬었다. 우리 꼬실이 심장은 정말 튼튼하다고. 그 튼튼한 심장 때문에 일주일 이상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여태 버티고 있는 걸까.
어둠 속에서 녀석 숨결을 손바닥 통해 느끼며, 녀석 심장 박동을 손끝을 통해 느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하기로 하고 못한 것이 많이 남았던 거다.
지난 녀석 생일날 예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앞에 놓고 촛불 켜고 어쩌고 딸이 손전화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걸 세탁기에 홀랑 넣고 빨아서 고장 나는 바람에 한 장도 못 건진 일이 있었다. 어찌나 서운하던지, 내년에 꼭 다시 그 아이스크림 케익 놓고 사진 찍자고 약속을 했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입버릇처럼 동호회 사람들에게 다짐을 해왔다. 우리 꼬실이 스무 살 되는 생일에는 뷔페 빌려서 잔치를 할 거야.
딸은 몇 년 남지 않은 그 날을 꼽으며 벌써 제 동무 초대하겠다고 약속을 받아 놨다.
눈이 보일 때는 거칠 것 없는 너른 마당을 머리카락 날리며 뛰는 걸 좋아했던 녀석은, 앞이 보이지 않자 뛰는 대신 뚜벅뚜벅 걷고 싶어 했다. 그러나 웬만한 실내는 가구와 문짝과 벽이 걸리고 바깥은 차 따위가 걸려서 마땅치 않다. 그래서 누나 졸업만 하면 깊은 시골 마당 넓은 집 찾아 들어갈 거라고 굳게 굳게 다짐했었다. 흐뭇한 표정 짓고 마음껏 걷는 꼬실이를 보면 그 이상 기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가을이 되고 낙엽이 지려면 아직 많이 남았는데 선선한 가을이 오면 유모차에 태우고 나갔다가 사람 뜸해지면 내려서 걷자고, 바스락 낙엽을 밟자고 언제부터 얘기했던가.
지난번에 내가 집에서 미용을 해주면서 저나 나나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다음에는 꼭 미용실에 가서 쉽고 예쁘게 해주마고 했었는데, 이제 요기조기 털이 삐쭉거려 곧 미용을 해야 할 텐데.
‘지금 떠나면 다시는 미용을 할 수 없잖아. 세상에서 제일로 멋쟁이, 우리 꼬실이.’
그것 말고도 하자고 한 일 많이 남았는데, 아직 조금 더 있어야 하는데. 손가락 끝에서 오글오글 꼬실이의 목숨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저도 하자던 것 마저 하고 싶어서인가. 하지만 가르릉 가래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억지로 버티지는 마, 너 하고 싶은 대로, 너 편한 대로 해.’
그 새 아침이 밝아 버렸다. 아직도 꼬실이 목숨은 손끝 아래서 콩닥콩닥 용을 쓴다. 무슨 꿈을 꾸는지 가끔 꽁알거리면서, 표정이 안온하다. 나도 그런 표정을 배우고 싶다.
- 김은미 반려견 에세이집 「꼬실이」(해드림) 중에서
(이 책은 상업적으로 기획된 책이 아니라 반려견 ‘꼬실이’와 18년 함께 살아온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오해 없으시길요.)
http://www.yes24.com/24/goods/4521672?scode=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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