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닌토 음악과 함께하는 가족별곡(21)
간운보월(看雲步月)이라는 말이 있다. 객지에서 고향 생각에 잠겨 멀리 구름을 바라보고 달그림자를 밟으며 걷는다는 뜻이다. 노량진역이 다가오면서 오른편으로 이동한 까닭이다. 한강이 아랫녘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을 바라보며 습관적인 사념에 빠진다.
초여름이나 초가을쯤 고막배를 타고 고향에 이르면 열흘이나 걸릴까. 언제든 강변에 닿을 수 있을 테니 별반 준비물은 없을 것이다. 밤길을 밝혀줄 남포등 하나, 고막배야 흐르거나 말거나 밤하늘 별들을 바라보며 몸을 넣을 수 있는 침낭 하나면 넉넉하지 싶다. 흙이 밟히는 곳, 하늘과 산과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 아침에 일어나면 젖은 풀 냄새 향기롭고 밤이면 달과 별들의 유영하는 소리가 들릴 듯한 곳, 요절한 형도 모자라 누이마저 묻혀 있는 곳….
아직 죽을 나이도 아닌데 수구초심에 시달리는 날이 잦다. 상처투성인 도회지의 삶 탓이다. 나가고 싶은 출구는 그곳이 아닌데, 전철은 내게 헛생각 말라며 4호선 환승역인 서울역에 내려놓는다. 지하 서울역에 내려 계단을 오르면 지상 서울역으로 통하는 개찰구가 어김없이 유혹을 한다. 서서히 지상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가 한강철교에서 가졌던 사념들을 다시 들들 볶아댄다. 그러나 어쩌랴. 털레털레 통로를 따라 4호선 지하로 내려간다.
재채기가 터질 것 같은 바람을 몰아 온 4호선 전철이, 나를 낚아채듯 잡아 태우고 충무로로 향한다. 회현을 지나 명동에 이르러 전철문이 스르르 열리는데 목구멍이 칼칼하다. 마음속으로 ‘형, 잘 다녀와!’한다. 부천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20년을 훨씬 넘게 형은 명동의 한 직장에 다녔다. 그러면서도 장남이 짊어진 가혹한 삶의 무게로 주니 한번 낼 수 없었다. 명동역에서 전철 문이 열릴 때마다 국화꽃 한 송이 바치고 싶은 마음을,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형은 알고나 있을까.
충무로역이 다가오면서 진정한 나의 0번 출구는 멀어져 간다. 충무로 5번 출구 44계단을 오르자 귀청이 떨어질 듯 웅웅거리는 도시, 그의 아가리가 나를 냉큼 집어삼킨다.
-이승훈 에세이집 「가족별곡」(해드림출판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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