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별곡

오늘처럼 바람이 불어쌓면

7154 2014. 12. 21. 10:24

 

 

 

 

오늘처럼 바람이 불어쌓면

     이승훈/수필가(해드림출판사 대표)

 

 

 

 

늦은 밤 텅 빈 사무실에서 야근을 할 때면, 시골 노모가 누운 안방의 고요가 스멀스멀 다가온다. 깊은 어둠을 뒤집어 쓴 채, 노모의 숨소리를 다독이는 시골집의 쓸쓸함이 정수리 위에서 너울거려쌓는다.

오늘처럼 밤바람이 싸가지 없이 지랄해쌓면 노모의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고 싶고, 슬며시 요 밑에 손도 넣어보고 싶어서 바람에 휘날리는 어둠처럼 마음이 허우적거린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어쌓면 처마 끝 풍경 소리가 동녘 하늘 총총한 별들도 청명하게 울리겠지마는 가는귀 어두운 노모는 허리만 더 구부릴 것이다. 늦은 밤 홀로 사무실에서 일할 때면 바로 옆에서 노모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유성은이 태진아의‘사모곡’을 부른다. 텔레비전‘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이다. 노래의 비감한 정조도 그러려니와 깊은 우물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목소리가 듣는 이의 숨소리를 조인다. 관객은 두 손을 모아 입에 댄 채 넋을 잃은 듯 몰입되어 있다. 자신의 노래를 타인이 부르는데 태진아 씨도 감동하여 눈물짓는다. 아마 가수가 아닌 아들로서 사모곡을 듣는 모양이다.

며칠 시골에서 노모랑 지내다가 또다시 노모를 홀로 두고 올라온 터라 가뜩이나 감정선이 노모에게 닿아있는 데 우연히 보게 된 이 동영상이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더구나 급자기 불어 닥친 한파가 영 싸기지 없이 굴어쌓는 밤이다.

 

노모와 단 둘이 시골에서 엿새나 지낸 것은 수십 년만인 듯하다. 머리 위로 전깃줄이 그물처럼 널린 도시를 벗어나, 조용하고 바람 맑은 곳에서 노모와 함께 지낸 엿새가 오랜만의 휴양이었다. 날마다 늙은 어머니가 아들의 세 끼 밥을 챙겼을지라도 노모의 매 순간을, 노모의 하루를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참 마음 놓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노모는 끼니때마다 밥상을 차려놓고 아들을 불렀다.

“밥 먹자.”

밥 먹자는 노모의 부름은 40여 년 뒤안길에서 들리는 듯 아득한 엄마의 목소리였다. 가난한 어린 시절 해 질 녘 들려오던, 서산 넘어 뚝 떨어질 해도 잠깐 멈칫거리게 하던 소리….

똑같은 냉장고, 똑같은 부엌에서 나올지라도 어머니가 차려내는 밥상은 달랐다. 갓 담가 내놓은 겉절이처럼 찬거리 순이 살아 있었다. 찬거리가 없어도 어머니가 차려내는 밥상은 언제나 풍성하였다.

 

여든 넘은 노모가 차려 준 밥상을 받자니 죄스럽기도 하지만, 노모가 차린 밥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더없이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노모가 차려준 밥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식사 후 밥상을 물린 채 동네 사람들 이야기며, 살아온 이야기며 잠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노모가 한사코 말리는 설거지를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노모와 아들을 오붓하게 만든다.

 

노모가 자식하게 하는 대우는 신령스럽다. 세상 어떤 누구에게도 받지 못하는 대우를 받는 것이다. 당신 밥보다 아들 밥을 먼저 푸고, 국도 먼저 뜨고, 아들 숟갈도 먼저 놓는다. 젊은 아들이 여든 노모에게 받는 이 은총 같은 환대를 세상 어디에서 받을까.

노모의 불 꺼진 안방 문을 지켜볼 수 있고, 안방에서 들려오는 노모의 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노모가 잠든 방에 슬며시 들어가 이부자리를 매만져볼 시간들이 또 언제 있을까 싶게 엿새를 보냈다.

 

여든 넘은 노인을 홀로 두고 집을 나설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묵직하니 거북하였다. 마치 노모를 안방에 가둬놓고 올라온 기분이다. 매사 강단 있는 어른이긴 하지만 그래도 노인이다. 모진 애옥살이와 참척(慘慽)으로 얼룩진 두려움이 가슴속 깊이 밴 노모를 또 언제까지 홀로 남겨두어야 할까. (엄니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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