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보도자료★★

한음 이덕형의 광주이씨 이명환 박사 '시조론', ‘둔촌선생휘집 실위시조’

7154 2019. 11. 7. 13:35

둔촌선생휘집 실위시조를 쓰면서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자부심도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써서 결과물이 책자로 나온다 해도 과연 누가 알아줄까 하고. 그러나 이 순간 불후의 명화 천지창조를 그린 어느 화가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그 높은 천장 바로 아래의 거치대 위에 4년간 꼬박 누워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꼼꼼히 그릴 때 지인이 물었답니다. “그렇게 구석구석까지 들인 정성을 누가 알아주겠나?” 그는 답했답니다. “내가 알아주네라고.



저는 4년이 아닌 6개월여뿐, 나만이 아닌 근열 도유사가 알아주고 시하 총무가 도와주고. 이에 이르러 저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솟았습니다. 그런 사명감이 오히려 일을 쉽게 해줄뿐더러 동기까지 유발시켜주었습니다.

따라서 이글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족보상의 시조와 우리가 일상 부르는 시조와의 차이였습니다. 하나의 시조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종중인데 우리는 1종중에 2시조이니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1세가 시조이고 1대는 그 아들이라는, 즉 세와 대는 다르다는 잘못된 이론이 광복 후에 등장하여 이에 지대한 영향을 세상에 미쳤습니다. 다음으로는 엄연히 전해오는 생원공(휘당) 시조비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족보상의 둔촌시조가 실 시조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헛수고였습니다. 때문에 역대 조상들이 직접 쓰신 비문, 묘지, 행장, 제문 등의 문헌들을 중심으로 논증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샛말로 팩트를 갖고 이런 문제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공허한 이론이나 원칙만으로 들이대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놀란 사실은 최초의 광이 족보가 나오기 80여 년 전부터 둔촌시조라 표기한 비문이 연이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여정에 오른 기분이었습니다.

서양의 어느 역사학자가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옛 선조님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조상님들의 말씀에 거짓이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조상의 말과 말은 글로 생생히 살아 우리 앞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광이 문중만이 갖고 있는 조상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요 자랑거리란 사실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이번 연구에서 80여 건의 관련 문헌들을 살펴본 결과 불과 5~6건을 제외하고는 둔촌시조, 둔촌 실 시조 내지 이에 상응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둔촌 선생이야말로 우리의 시조가 되실 수밖에 없는 분일뿐더러 둔촌시조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시조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되는 인물이셨습니다.


둔촌 선생의 위업이 너무나도 고귀하게 빛을 발하기에 그것은 어두운 밤하늘에 한 줄기 혜성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겁이 좀 들기도 했습니다. 조그마한 이 책자가 오히려 그 빛을 흐릴까봐.

이렇게 나온 이 책자가 나름으로는 힘들여 이뤄진 결과물이지만, 아직도 바르게 고쳐야 할 부분이나 내용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 부족한 부분을 잡아주고 채워주실 몫은 이 책을 읽어주실 종친들이십니다.

아무쪼록 이 조그마한 책자가 광이의 정체성과 후배 종인들의 보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가 되길 빕니다.